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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창문베다니 은혜의 창문(4-20-08) 내 안의 위대한 나 (로버트 맥기 지음) 제1부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시작 1장 질그릇 안에 있는 나 솔직하게 털어놓기 우리 중에는 방치와 학대, 조종으로 인해 정서적․영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 방치와 학대와 조종은 흔히 역기능 가정(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이혼 아버지나 어머니의 부재, 지나친 분노와 언어적․신체적 학대 등등)에서 나타나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자신의 죄악된 본성과 다른 사람들의 불완전함 때문에 상처받고 살아간다. 그래서 상처의 결과들을 발견해 나가다 보면 간혹 울적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상처가 깊건 다소 가볍건,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정직하게 살피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야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감정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화내실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경을 보라.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 우리와 사람들이 피상적인 관계를 맺거나 피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다윗은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6)라고 썼다. 주님은 우리가 진실하고 정직하기를 바라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사랑과 용서와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성경 안에서 자기 가치 찾기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자괴감을 갖게 하고, 우울증에 빠뜨리는 전쟁터라고 경고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영적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태평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이미 궁극적으로 전쟁의 승리를 확보해 놓으신 것도 모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터가 아닌 놀이터라고 생각한 나머지 어려움이 닥치면 놀라고 혼란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현실에서 이루는 자기실현은 인생의 문제들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문제에 하나님의 구체적인 해결책을 얼마나 잘 적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발견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교회와 세상 모두로부터 잘못된 가르침을 들어왔다. 세상의 일부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좋아하게 만들면 자기 가치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적 자아상은 그런 식의 제한된 견해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근거해 자신과 하나님과 타인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 정확하고 성경적인 자아상 안에는 힘과 겸손, 죄로 인한 슬픔과 용서에 대한 기쁨,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절박한 깨달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모두 담겨 있다. 2장 내 안의 위대한 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됨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살았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 가운데 인간에 비할 만한 것은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갖추고 온 땅을 다스릴 임무를 부여 받은 탁월한 피조물이었다(창 1:26-28). 아담과 하와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최초의 인간은 지성, 자유 의지, 감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드러내게 될 존재였다. 사탄도 아담과 하와처럼 완벽하게 창조된 존재였다. 그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된, 가장 지위가 높은 천사였다. 또한 더없이 아름답고 강했으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섬기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루시퍼는 교만에 빠져 하나님께 반역했고 천사 삼분의 일과 함께 천국에서 쫓겨났다(사 14:12-15). 이후 그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보다도 영리한 뱀의 형상으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아담은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지만, 루시퍼처럼 하나님께 반역한다면 권세와 완전한 상태를 상실하고 사탄과 죄의 종(롬 6:17),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엡 2:3)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인간을 파괴하면 자신이 땅을 차지할 수 있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탄은 먼저 하와를 속였고, 하와는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 아담은 하와와는 달리 사탄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안전함을 스스로 버리고 하와를 따라 죄를 짓기로 선택했다. 그로 인해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분과의 친교와 교제도 상실했다. 아담이 의도적으로 반역함으로써 사탄은 지상에서 힘과 권세를 얻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 역사는 예루살렘 외곽의 한 언덕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그곳에 구세주를 보내셔서 인간의 반역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하셨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 우리의 행동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는 것일 때가 많고 대개는 스스로에 대해 믿는 바와 일치한다(잠 23:7).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자기 가치의 토대로 삼으면,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나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인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구한다면 우리의 행동은 불안정에서 나오는 불안감과 두려움과 분노를 반영하게 될 것이다. 가정환경은 신념과 정서를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신념과 정서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스콧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는 가정에서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새롭고 힘든 일을 시도할 때마다 스콧의 부모는 기를 꺾어 놓았다. “스콧, 넌 아무것도 못할 거다. 그러니 시도도 하지 마라.” 이런 식의 말을 20년 동안 듣다 보니 그는 그 말을 정말로 믿게 되었다. 왜 그가 성적 불량으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직장을 계속 옮기는지 스콧 자신도, 부모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봐야 결국에는 실패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스콧은 그런 자기 인식에 맞추어 모든 일을 해 나갔던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서 분리될 때,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방법은 스스로의 능력과 다른 사람들의 인정뿐이고 결국에는 주위 상황에 따라 자신을 판단하게 된다. 사탄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을 끊임없이 속여서 어떤 일을 매우 잘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믿게 만들고 있다. 사탄의 거짓말은 아래의 등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자기 가치 = 행위 + 평판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제2부 나에 대한 거짓된 믿음 3장 나의 가치는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 사탄의 거짓말 우리 대부분은 사탄이 얼마나 철저하게 우리를 속였는지 모른다. 사탄은 우리를 자신이 세운 기준조차 채우지 못하는 무능함의 포로, 자괴감의 노예로 만들어 다짜고짜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사탄은 우리에게 쇠사슬을 채워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와 목적을 체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공이 만족감과 행복을 안겨 준다는 말은 누구나 믿기 쉬운 대표적인 거짓말이다. 모종의 기준들에 도달하면 자부심을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한 우리는 그 기준에 맞추려 노력했다. 그러나 거듭해서 실패했고 그때마다 비참함을 느껴야 했다. 남보다 많은 성공을 거두는 경우에도, 가끔 겪는 실패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와 스스로를 실패자로 낙인찍곤 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 모두는 일정 수준의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우리의 안전과 가치는 위협을 받으며, 그런 위협을 느낄 때 실패의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 순간, 특정한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거짓 믿음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생각할 때, 사탄의 왜곡된 진리가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서 자주 드러나게 된다. 사탄의 거짓말에 대응하는 여러 모습들 매일 매일 해야 할 목록을 작성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한순간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약간 긴장한 상태로 있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누군가 그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으면 그는 화를 냈다. 시간을 최대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해 만족감을 얻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비참해질 뿐이었다. 언제나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 왔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 목표를 달성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를 원하신다고 믿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가끔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의 해결책은 늘 더 열심히 일하고, 시간을 더 잘 쓰고, 스스로 정한 규칙을 더욱 엄격하게 지키는 것으로 되돌아 왔다. 그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부과한 규칙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자신이 정한 스케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간순간 주의를 기울여야 그분의 주 되심을 체험할 수 있다. 4장 오직 그리스도만이 삶의 원천이다 속죄양, 그리스도 자신의 가치를 행위, 평판과 동일시하는 일은 행위의 덫으로 당신을 사로잡기 위해 사탄이 만든 공식(자기 가치=행위+평판)을 그대로 믿는 짓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 등식을 완전히 폐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 능력과 전혀 별개로 우리를 확고하게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 죗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고후 5:21). 자, 이제 대차대조표 하나를 머릿속에 그려 보자. 한쪽에는 당신의 모든 죄가, 다른 쪽에는 그리스도의 의가 적혀 있다. 이제 그 둘의 위치를 바꿔라. 이것이 칭의(稱義)의 개념을 잘 보여 준다.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돌리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칭의(稱義)에는 죄책감이 따라붙지 않고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셨다. 히브리서 10장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우리는 하나님께 완전히 용서를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놀랍지만 칭의(稱義)가 뜻하는 바는 죄의 용서 그 이상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신 바로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자격, 즉 의(義)를 허락하셨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가치를 우리에게 돌리신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저주받은 죄인이 아니라고 선언하신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을 선사하는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들이 의로운 사람들이 되어 그분의 사랑과 영원한 뜻을 온전히 체험하길 원하셨다. 죄로 인해 그러한 관계가 끊어졌으나 예수님이 완벽하게 우리 죗값을 치르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풀어내셨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의로운 지위를 누리며 주님을 알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생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안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왠지 불쾌하고, 하나님도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보실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무(無)로부터 유(有)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분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땅을 창조하시고 풍요롭게 채우시자 땅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전에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의로운 자로 선포되었다! 로마서 5장 1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은 모든 사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완전하게 죄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은 나를 온전히 기뻐하신다.” 칭의의 요점은 이 땅에서는 우리가 완벽함에 이를 수 없고, 자기의(自己義)를 향한 최선의 노력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이다(사 64:6).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로 우리 죗값을 치르게 하시고, 우리에게 아들의 의(義), 즉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완벽한 지위를 허락하셨다. 이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상관없다거나 무슨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죄용서와 의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과 삶을 향한 강한 의욕을 느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 고린도후서 5장 9절, 빌립보서 3장 8-11절과 그 외 다른 여러 구절에서 자신을 의롭게 만드신 하나님께 기쁨과 존경과 영광을 돌려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표현했다. 우리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안다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이 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시도 하는 것이다! 5장 부정적인 ‘Yes!’, 긍정적인 ‘No!’ 거절 하나도 두렵지 않다 당신은 거절의 두려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차갑고 무심한 모습을 연출해 일부러 깊고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피한다. 거절을 두려워하며 움츠러들어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모든 사람의 요구를 끊임없이 받아 주는 사람도 있다. 부끄러움이 많아 쉽사리 조종당하는 사람도 있고, 비판에 민감해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도 있다. 거절의 두려움이 커지면 적의를 품게 되거나 신경질환에 걸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평판에 근거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 하면 결국 속박에 이르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납하심의 진리 안에 거하면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된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자기 가치의 근거로 사람의 인정이나 하나님의 인정 가운데 하나를 구하게 된다. 둘 다를 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기 원하시고 그 정당한 주권을 다른 누구와도 나눌 의향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절의 두려움을 극복할 방법은 사람들이 내건 조건을 만족시키며 받는 인정보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인정을 값지게 여기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매우 크다. 그래서 나 스스로 ‘인정 중독증을 타고났다’고 농담 삼아 말한다. 나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따라서 내게는 뭔가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랐다. 언제나 내 자신이 부적격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바뀌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다른 사람들의 조건적인 인정을 아무리 받아도 좀처럼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칭찬을 받을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을 유지하지 못하면 결국 무시당할 거라는 사실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따라서 나는 성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식과 경험이 늘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진 지금도 가끔씩 그런 행태에 빠지곤 한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이 놀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님을 뵙는 그날까지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성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기뻐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한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다 보면 성령께서 이 해방의 진리를 삶의 여러 측면에 점점 더 깊이 적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자기 가치의 근거로 삼고 있는 영역들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이런 영역들을 더욱 많이 발견할 것이고,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완전한 용납하심에서 우리의 존재 의의를 찾기로 거듭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체계에 심오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정직과 객관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랫동안 끊임없이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6장 하나님은 무조건 당신을 사랑하신다 구원의 선물은 완벽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영적 존재로 다시 태어났지만 여전히 세상의 사고방식에 기울어 있는 존재이다. 많은 시간 동안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떨쳐 버리기가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불렀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은사를 받았지만, 그들은 아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지 못했다(고전 3:1-4 참조). 고린도 교인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많다. 아직도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과 인정을 통해 존재 의의를 획득하려 시도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을 바라본다. 올바른 기독교적 언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늘 말하고 프로그램들을 만들지만 영적인 외양만 갖췄을 뿐 깊이와 알맹이는 없다. 우리의 온갖 신앙적 활동들은 주님의 손길이 빠진 인간적인 노력이 되고 만다. 그것은 거짓된 삶이다. 성공과 인정을 향한 욕구는 세상적이고 중독성 있는 방식으로 자기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다. 자기 가치의 토대를 바꾸고 남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면 얼마간의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성공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와 성숙함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더 이상 보탤 것 없이 완벽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자기 가치의 근거로 삼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희생보다 더 값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들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찾아 은혜를 베푸신 구세주이시며 우리를 좇아와 아들로 삼으신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아무 힘도 보탤 수 없다. 우리를 찾아내시고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일 뿐이다. 제3부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 7장 남 탓하기 내 탓인가, 남 탓인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 모두는 실패를 탓할 사람을 찾아 손가락질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나 그렇게 만든 범인 또는 희생양을 찾는다. 그런데 대개의 상황에서는 자신 이외에 탓할 사람을 찾지 못하므로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 부모가 실패할 때 자녀는 그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을 쉽사리 떠맡기도 한다.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옹호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역기능가정의 아이가 학대받은 사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날 괴롭힌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안했어요. 그랬다가 누가 아빠를 데려가 버리면 안 되잖아요.” 이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해 응보의 법칙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 제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누군가 실패나 결점의 대가를 치르게 하도록 배워 왔다. 직장에서 마감시한을 맞추지 못하면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만방에 공표한다. 제대로 안 된 집안일이 있으면 가족 중에서 범인을 찾는다. 주위에서 보는 모든 결함을 놓고 탓할 사람을 찾는다. 잘못한 사람을 제대로 찾아 처벌함으로써 자신은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타인의 실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실패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실패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완전한 용서를 받았고, 그분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고 전적으로 용납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자이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면 정죄의 태도는 결국 사랑의 태도, 돕고 싶은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 이러한 진리들을 믿음으로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고(요일 4:11),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를 용서하고(엡 4:32),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신 것처럼 그를 용납할 수 있게(롬 4:32)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스럽고 의로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죽으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자, 매정한 자, 이기적인 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오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 마땅한 의로운 유죄판결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실패한 사람들을 오래 참음과 친절로 대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와 죄를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용서하신 우리의 죄와 비교해 보면 곧 깨닫게 된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용서해 주신 나의 반역죄에 비할 만한 잘못을 내게 저지를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정말 한줄기 빛과 같은 깨달음이다. 8장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아들 삼으셨다 엄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엄한 분이시다. 이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의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 거룩하심에 따라 그분만큼 의롭지 못한 자들을 처벌하신다. 처벌이 불공평해 보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죄에 대해 하시는 많은 말씀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은 투표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모든 규칙을 정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고 생각하시며 그것은 사실이다. 그분은 인간의 인기를 얻기 위해 변할 의향이 없으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이해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감사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 대신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독생자(獨生子)를 주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바라보며 무엇을 참으셔야 했는지 생각해 보면 화목제물을 주신 그분의 놀라운 은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를 시작으로 오늘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명백한 악행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탐욕과 증오, 성욕과 교만으로 얼룩져 왔다. 그 모두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을 배반한 터무니없는 반역의 증거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닌 한, 우리의 모든 행위, 심지어 우리의 선행조차 하나님께는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친아들로 삼다 그분은 전능자요, 우주의 정의로운 재판관이시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완벽하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이러한 속성들 때문에 하나님은 죄를 못 본 체할 수도, 악한 행동을 부분적으로 용납하시는 타협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그분의 반감은 의로운 분노로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대한 의분(義憤)뿐 아니라 무한한 사랑도 가지신 분이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꾸짖으시지만, 우리 죗값을 위해 아들의 죽음을 정하심으로 세상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그분께 영광을 돌린 성인들을 위해서였는가? 그분의 죄 없는 삶을 제대로 알고 그분을 섬긴 세상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반역자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절망스런 존재였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롬 5:7-11).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낸 지극한 사랑의 깊이를 누가 측량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함 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채워졌고,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심판의 눈으로 보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제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다. 성경은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롬 8:38-39). 하나님은 우리를 입양하여 그분과 함께 다정하고 친밀하고 놀라운 관계를 맺게 하셨다(롬 8:15). 9장 과거의 나를 완전히 벗어 버려라 다른 시각으로 과거 보기 기억에 남아 있는 과거의 행동을 평가하고 그 평가에 근거해 자아상을 만드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어제의 실망이라는 못난 터 위에 나를 쌓는 것이다. 또 때로는 실패한 자신의 모습에서 묘한 위로를 얻기도 한다. 자신의 잠재력에 훨씬 못 미치는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나면 모종의 안정감을 느낀다. 스스로 부족하기 그지없다고 여기고 자신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데 더 이상 실망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자. 무엇이 자신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붙잡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는 변할 수 있다! 견디고 극복할 수 있다! 옛날의 실패라는 오물 속에서 허우적대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떨치고 일어서서 새로운 삶을 건설할 수 있다. 옛 자아상에서 과감히 벗어나라 폴 투르니에 박사는 인생을 공중그네에 매달린 사람에 비유한 적이 있다. 공중그네의 손잡이는 그 사람의 생활공간과 생활패턴, 라이프스타일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또 다른 공중그네가 그의 시야에 들어오면서 그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과거를 놓아 보내야 하나? 새로운 손잡이로 손을 뻗어야 하나? 투르니에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새로운 손잡이를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손잡이를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깨닫는 때가 바로 진리의 순간이다. 과거에 누군가에게 방치되고, 속고, 학대받은 극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지 않으면 오늘의 기쁨을 누리거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실패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오랫동안 씨름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나는 내 자신과 주위환경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며 자라났다. 나는 스스로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유난히 키가 크고 너무 마른 체격의 내 외모가 나는 맘에 들지 않았다. 열등감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데이트 상대를 구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사교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단지 함께 있으면 편안한 몇몇의 친구하고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나는 서서히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나의 자존감은 상당히 높아졌다. 과거의 기억들은 많은 부분 여전히 고통스럽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로 인해 계속 달라지고 있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되자, 몇 년 전 같으면 생각도 못했을 많은 새로운 일들을 시작해 볼 의욕이 생겼다. 그 일을 시도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모두 맛보았다. 하나님은 그 일들 하나하나를 사용하셔서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건 그분 안에서 변함없이 값진 존재임을 가르치셨다. 10장 새로운 생명을 얻다 새로운 생명을 얻다 당신의 죄와 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능력, 어느 쪽이 더 강한가?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죗값보다 클 수 있는가? 이제는 아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심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중생한 자들을 자줏빛으로 만드시거나 노란색 반점이라도 찍어주시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달라졌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셨다고 누누이 말씀하실 뿐이다. 그분의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이제 우리 몫이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말씀보다 성경에서 중생을 더 잘 보여 주는 구절은 없을 것이다. 삭개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 로마 제국에서 세리들보다 더한 경멸을 받는 대상은 없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혈을 짜내어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삭개오는 예수님이 마을을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잘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그를 보시고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삭개오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 다음 예수님은 그와 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셨다. 저녁 식사를 들면서 삭개오는 그리스도의 무조건적 사랑과 용납하심을 경험했다. 그 결과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자아상은 경멸받는 세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행동도 변화되었다. 죄를 회개했고, 남에게서 갈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삭개오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자아상,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중생은 자기계발법도 아니고 악한 본성 없애기 운동도 아니다. 중생은 새로운 생명이 전달되는 일이다.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役事)다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가 사람 안에 자리 잡는 것이고,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성령의 영향력 아래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원칙적으로 지성, 의지 그리고 감정과 정서를 포함한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를 믿고 새 생명과 용서,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 삶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중생이 우리 행위의 모든 영역에서 당장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중생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틀거리고 넘어지겠지만,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과 가치에 합당하게 행동하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우리는 태도와 행동에서 점차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이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놀라울 만큼 특별한 존재이고 독특한 기질과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영하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다양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능력을 갖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그리스도인과 다른 빛을 비춘다. 제4부 새롭게 태어나는 나 11장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라 그리스도 희생의 의미 구원받은 우리가 당당하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은 사탄의 속임수뿐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참된 예배의 자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능력과 권세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체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이 놀라운 진리를 인식하고 경험하지 못하게 속임수와 궤계(詭計)를 부린다. 사탄의 속임수를 극복하고 거짓 믿음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자유와 의욕과 능력을 더욱 많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진리, 십자가의 진리, 구속의 진리의 근원이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는 끊임없는 원동력이라고 썼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5-9). 이 구절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잊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목적이자 성장의 중심이다. 성령, 변화의 원동력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친밀한 가르침을 주신 마지막 시간에 이 질문에 답하셨다(요 13-16장). 예수님은 자신은 얼마 후 죽임을 당하겠지만 제자들 혼자 남겨지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그 보혜사는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그로부터 50여 일 후 오순절에 오셔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셨다. 동일한 성령께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교사요, 상담자, 영적 능력의 근원이 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삼위이신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신성의 모든 속성을 갖고 계신다. 그분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나아가 그분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 들어와 영적인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의 능력 덕분이다(요 7:37-39, 15:1-8). 12장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해결하라 죄책감에 대한 여러 견해들 죄책감은 정확히 무엇일까?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회적 계약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아이의 머릿속에서 죄책감이 태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아이의 두려움이 죄책감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회적 존경을 잃을까 봐 겁을 내거나 본능적인 충동에 이끌려 사회의 공인된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알프레드 아들러는 열등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 죄책감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죄책감은 스스로 제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자책의 고통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모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부인하는 관점에서 죄책감의 고통을 설명하려 했다. 그들은 인간적․실존적 기반만으로도 죄책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크리스천 저술가 브루스 내러모어와 빌 카운츠는 ‘진짜’, ‘가짜’라는 수식어를 붙여 죄책(죄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guilt와 죄책감을 뜻하는 guilt를 구분했다. 이는 보다 성경적인 견해로, 설명에 따르면 ‘진짜’ guilt(죄책)는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가짜’ guilt(죄책감)는 고통과 거절을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그들은 성경이 법적․신학적 죄책에 대해 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신약성경에서 죄책(guilt)은 한정된 의미로 쓰인다. 그것은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서 죄책, 즉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존재는 비그리스도인 뿐이다). 죄책감과 죄의식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자주 말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깨끗함과 그에 반대되는 우리 죄를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우시고 격려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지만(요 16:8), 그리스도인에게 죄의식을 주시는 것은 죄책감으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신분과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고, 죄책은 더 이상 없다. 죄의식은 우리의 신분이 아니라 행동만을 다룬다. 죄의식은 하나님의 진리와 기준에 비추어 우리가 잘못한 바를 보여 주시는 성령의 방법이다.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잘못을 고치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죄의식을 주신다. 죄책(감)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고 사탄이 주는 것이지만, 죄의식은 성령께서 주시는 믿는 자의 특권이다. 죄책감은 우울증과 절망을 일으키지만, 죄의식은 하나님의 용서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13장 삶을 새롭게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마음을 새롭게 하라.” 어떻게 하란 말인가? 혼잣말 정도로는 안 된다. 똑같은 말을 되뇌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우리가 평생 붙들고 살아온 사고방식 일부를 실제로 바꿔야 한다. 다음은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 우리가 속아 왔음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한다. ☞ 지금껏 거짓말을 믿어 온 것에 대해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이 속임수가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 오랫동안 믿어 온 속임수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바를 믿기로 선택해야 한다. ☞ 평소처럼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 내면 여행 시작하기 파괴적인 감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파괴적인 생각에서다. 무엇이 파괴적 생각을 유발하는가? 거짓 믿음이다. 그럼 거짓 믿음은 어떻게 활기를 얻는가? 우리가 처하는 상황을 이용해서다. 그렇다면 우리의 거짓 믿음이 발동하지 않도록 상황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을까? 때때로 그런 시도를 해보지만 성공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러므로 거짓 믿음들을 없애고 하나님이 보여 주신 진리로 그 자리를 대체해야만 한다. 상황 ↓ 믿음 → 생각 → 감정 이 과정을 ‘내면 여행’이라고 부른다. 몸 안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는 잘못된 것을 찾기 위해 모종의 영상검사를 받는다. 내면 여행은 이와 비슷하게 거짓 믿음을 찾는 과정이다. ① 제1단계: 속박 상황에 따라 거짓 믿음이 유발될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잘못된 감정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바로 너 때문이야.’ 그러나 화가 나고 자신의 반응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게 되거든 치약 튜브를 생각해 보라. 오늘 아침 당신이 치약 튜브를 누르자 치약이 나왔을 것이다. 치약이 나오는 이유는 튜브 안에 치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한번 눌렀는데 당신 안에서 정말 불경건하고 당혹스러운 반응이 나왔다고 하자. 당신은 자신의 반응을 두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만 그것은 원래 당신 안에 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스스로 보게 하시려고 곤란한 상황을 만드시곤 한다. ② 제2단계: 순종 순종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지면, 이전의 믿음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 위에 굳건히 설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라의 상사는 매우 괴팍한 사람으로, 사라를 괴롭히는 걸 즐겼다. 그녀가 아주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온갖 난리법석을 떨었다. 안 그래도 평생 ‘잘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시달리던 그녀는 직장을 그만둬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상황을 다르게 보자고 제안했다. 사라의 상사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평판을 근거로 자신을 평가하는 덫에서 벗어날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상사의 괴팍함을 사용해 그녀가 그동안 어떤 메시지를 믿어 왔는지 알아 낼 계획을 세웠다. 그 메시지들은 그녀가 성공과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근거해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처음에 사라는 거부감을 보였다. 그러나 곧 내면 여행의 모든 단계를 밟아 나가는 데 익숙해졌다. 상사에 대한 두려움은 이내 사라졌고, 상사도 곧 자신이 그녀에게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몇 달 뒤, 그녀는 더 나은 일자리를 제의받고 자리를 옮겼다. 그 상사는 사라의 삶을 지배하던 거짓 믿음들을 밝혀내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③ 제3단계: 자유 거짓 믿음을 하나님의 진리로 대체하지 않고 버티기란 불가능하다. 이 거짓 믿음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붙들고 사용한 우리 눈에는 마치 그것들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처한다면 옛 믿음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거부하고 하나님께 자백하고 대체해야 한다.
사라의 사례를 활용하자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상황: 사라의 상사가 그녀가 방금 타이프한 편지를 그녀에게 집어던진다. 몇 가지 고쳐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상사는 그녀가 왜 이런 실수를 잡아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며 그녀의 지능이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사라의 반응: 사라는 속이 울렁거리면서 겁이 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즉시 자신이 겪고 있는 바를 하나님께 말씀 드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방금 어떤 거짓 믿음과 고통스러운 옛 메시지의 방아쇠가 당겨졌는지 보여 주시기를 구한다.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어 상사가 말한 부분을 보던 그녀는 옛날 자신이 어머니가 아끼던 접시를 깼을 때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녀는 그때 야단맞은 그 느낌으로 늘 스스로의 실수를 정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실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기억을 적어 놓고 문서를 다시 타이프한다. 순종단계: 다음 휴식시간, 사라는 그 동안 거짓 믿음들과 파괴적인 메시지들에 집착해서 그녀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성령께 보여 주시기를 구한다. 자신의 삶이 거짓된 것에 그토록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슬퍼하면서도, 자신이 거짓된 믿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는지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마음을 연다. 이 과정이 하루 종일 계속된다. 그날 저녁, 사라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알려 주신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하나님께 말씀 드린다. 자신이 이 영역에서 거짓을 믿고 살았음을 인정한다.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고, 그녀를 그 용서 안에 살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지 묵상한다. 사라는 자신이 용서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상사와 어머니를 용서한다. 사라는 이와 같은 과정을 아주 많이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상사를 그녀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소중한 도구로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도 가끔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지지만, 이제는 그런 불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불안의 이유 또한 알 수 있다. 결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알지 못할 때도 우리 속에서 바쁘게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이생에서 자유를 찾기 원하시고, 우리에게 이 자유를 누릴 기회를 주기로 작정하셨다. 비록 우리는 이생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경험하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의 계획에 기꺼이 협력한다면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이 일은 하나의 과정이 될 것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과 더욱 깊이 있는 관계를 맺기 원할 때만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갈등과 실패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늘 우리 곁에 함께하신다. 문제는 하나뿐이다.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갈 의향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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