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 지혜의 창문(3-30-08)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이덕일 지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다.”                                        -정조 어록 중에서-


500년 조선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던 임금.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간 현군. 독서와 학문에 몰입하여 끝없는 수양으로 다져진 완성된 인격을 추구했던 사람. 탁월한 지도력으로 어지러운 정국을 돌파했던 철인군주. 열린 사고로 다양한 인재를 포용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했던 개혁군주, 정조의 희망과 좌절, 성공과 회한, 도전과 꿈이 흡입력 있게 펼쳐진 역사서이다.


정조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이며, 현실이 응축된 미래라는 사실’을 수없이 탐독했던 역사서 속에서 깨닫고,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길, 미래를 향해 걸었다. 이 책의 18가지 주제는 이러한 길에서 정조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그가 헤쳐나간 철인정치의 면모를 뛰어난 이야기 구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정조시대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다양한 1차 사료들을 참고로 했다. 정조와 그의 시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정조실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모든 치세가 부정되는 속에서 그의 정적에 의해 편찬된 사료이기 때문에, 관찬사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문집들과 외국의 기록까지 망라했다. 이 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런 1차 사료들에 충실하면서 정조시대를 해석하려고 한 시도다.


저자의 말은, 왜 오늘 우리가 정조를 기억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게 여운을 남긴다. “1800년 6월 28일 유시. 미완의 꿈을 남긴 채 정조는 세상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한 군주의 빈자리는 그토록 큰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정조는 오늘날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가 200년 전 꿈꾸었던 꿈이 지금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열고자 했던 그의 미래가 우리의 내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와 햄릿보다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지만 운명에 굴하지 않았던 사람, 끝없는 수양으로 완성된 인격을 추구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조선을 새롭게 바꾸려 했던 초인, 자신과 역사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려 했던 한 철인군주의 꿈이 미완인 채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설치(雪恥)

순조 즉위년(1800) 8월 15일 추석날 밤.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현 구미시). 대보름이었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달은 보이지 않았다. 온 동네가 흥성거리는 이날. 단 한 집만이 적막에 싸여 있었다. 사대부 장시경현경 부자의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 태반이 장시경의 땅을 부쳐먹는 전호(佃戶)들이어서 사실상 이 마을은 장씨 일가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을뿐만 아니라 장씨는 인동의 가장 큰 대성(大姓)이어서 세도가 당당했다. 그런데 가장 흥겨워야 마땅한 장시경의 집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음울한 분위기라기보다는 결전을 앞둔 군영(軍營) 같은 비상한 기운에 덮여 있었다.


장시경은 사노(私奴) 이영태를 찾았다. “가서 동네의 상한(常漢, 서민)들을 모두 불러오너라.” 향리(鄕里)에서 장시경의 별명은 생불(生佛)이었다. 마을의 상한들은 물론 노비에게도 욕 한마디하는 법이 없었고 인심도 후해, 불러서 일이라도 시키면 꼭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곤 했다. 자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장시경현경 부자의 일이라면 마을 사람들은 언제라도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장시경이 한 말은 뜻밖이었다. “지금 국가에서 어약(御藥)을 과도하게 써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란 바로 선왕(先王) 정조의 죽음을 뜻했다. ‘약을 과도하게 써서 죽었다’는 말은 곧 독살 당했다는 말이었다. 시골 백성들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설사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해도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정치는 양반 사대부들이 하는 것이고 자신들은 농사나 열심히 지으면 되었다. 그러나 임금이 ‘어약을 과도하게 써서’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백성들의 가슴은 뛰었다. 그 임금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마다 국왕이 재산인 내탕금과 관곡을 풀어 구휼했기 때문에 굶어 죽는 백성이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장시경의 말이 이어졌다. “어린 세자가 뒤를 잇게 되자 노론(老論)이 득세했고, 남인(南人)은 남김없이 쫓겨났으며 민생(民生)은 날로 고달프게 되었으니, 이렇게 국세가 외로울 때 나와 너희들이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정조의 죽음에는 의관(醫官)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배후에 현직 정승이 있다고 의심할 정도로 정조독살설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장시경의 계획은 서울로 올라가서 정조를 독살한 역적들을 처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조를 독살한 역적을 치는 토역군(討逆軍)인 셈이었다.


장시경 형제와 장현경은 토역군과 함께 인동 관아를 향해 걸었다. 장시경 형제와 장현경 등 4인이 먼저 인동 관아의 관문을 두들겼다. 장현경은 마을 사람들에게 가져온 몽둥이로 문 곁의 담을 두들기게 했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두들기자 담의 기와와 흙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한쪽 구석이 무너져 갔다. 그러나 담장이 무너지는 소리에 더 놀란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간 백성들에게 관아는 공포 그 자체였다. 관아 안에서 이방이 군졸 10여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군졸들이 나타나자 겁이 덜컥 난 마을 사람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한번 흩어지기 시작하자 급조된 토역군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장시경 형제와 장현경이 막았으나 토역군은 이내 겁에 질려 보통 백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기세를 놓칠세라 이방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관문을 열고 나와 백성들을 체포하러 다녔다. 장시경 형제들과 장현경 등 주모자 4인도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시경 삼형제는 천생산성(天生山城)의 낙수암(落水巖)위로 올라갔다. 이들은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할 줄은 몰랐다. “장차 대사를 도모하려 했는데 일이 어긋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찍이 자처(自處)하는 것이 낫다.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먼저 죽는 것이 억울하다.” 장시경은 천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동생 장시욱은 막내 장시호가 차고 있는 칼로 목을 두 번 찌르고 가슴을 한 번 찔렀다. 그래도 죽지 않자 그 역시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장시경과 장시욱은 죽었지만 막내 장시호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어도 살아남았다. 정조가 사망한 해 추석에 벌어진 일이었다.


9월 23일, 현직 정승인 영의정 심환지는 사건 처리 방침을 섭정 중인 정순왕후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군사까지 일으킨 반란 사건의 처리치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대했다. 독살설의 배후가 일파만파로 번져나갈 것이기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건을 축소해 조용히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다른 역모 사건들과는 달리 조용히 처리되었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룻밤 꿈처럼 그저 지나고 나니 끝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에게 이 사건은 하룻밤 꿈일 수 없었다. 옥산 부근에서 부친 장시경과 떨어져 종적이 묘연해진 장현경의 집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장현경의 부인과 자식들이 체포되었고 연좌에 의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족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세상이 모두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왕세손 이산(李祘)은 경희궁 숭정문(崇政門) 앞에 섰다. 감개무량했다. 그 길고도 험난했던 고개를 비로소 넘은 것이었다. 선왕(先王) 영조가 승하한 지 5일 만이었다. 선왕이 승하하면 당일로 보위를 물려받아야 하겠지만 세손은 굳게 거부했다. 영조를 잃은 세손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영조의 나이 여든셋, 왕위에 있는 기간만 52년이었다. 그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고, 그 누구보다 인자했으나 때로는 그 누구보다 냉혹했던 그런 임금이었다. 세손이 영조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하는 것은 보통 조손지간(祖孫之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정조는 없었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정조는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을 버린 영조는 손자만은 끝내 보호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 명실상부하게 영조의 후사가 되는 순간, 세손은 눈물을 흘리며 망설이다가 거듭된 재촉에 마지못한 듯 유교(遺敎)와 옥새를 받았다. 이제 비로소 대권을 손에 쥔 것이었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그 소년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스물다섯의 나이였으나 25년 동안 그가 감내했던 고통과 사색과 번민의 무게는 동시대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1776년 3월 10일! 즉위식을 마친 정조는 “어둑새벽 이전의 잡범 중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라”는 대사령을 내렸다. 국장과 겹쳐 있는 즉위 당일 대사령을 내리는 것으로 마감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빈전 밖으로 대신들을 부르라.” 대신들을 부른 것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빈전 밖에 도열한 대신들은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대신들은 신왕의 첫 육성을 기다렸다. 즉위 일성은 신왕 시대를 재는 척도가 될 것이었다. 빈전 밖에 대신들이 도열해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정조의 가슴은 뛰었다. 갑신년(영조 40년) 이후 고통 속에 간직해 왔던 말을 드디어 토로할 때였다. 장장 13년의 세월이었다. 정조는 빈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일성이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경악했다. 비록 국왕이 되었다지만 조정은 아직 그 아버지를 제거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팔자흉언(八字凶言, 여덟 자로 된 흉언)’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3년 상을 마친 재위 40년, 세손의 호적을 이복(異服) 백부(伯父)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종통의 중요함을 위해서’였다.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준 것이었다. 세손의 법적인 어머니도 혜경궁 홍씨에서 효장세자의 부인 조씨로 바뀌었다. 오늘의 즉위도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로 한 것이었다. 그런 세손의 즉위 일성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노론은 경악했다. 15년 전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모습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외척 전쟁

1759년(영조 35년) 6월 22일 오시(午時: 11~1시). 예순여섯의 영조는 어의궁(於義宮)으로 향했다. 새로 신부를 맞이하는 친영례(親迎禮)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 이을 한 소녀가 어의궁에서 영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간택 끝에 뽑힌 김한구의 딸로 불과 열다섯 살짜리 소녀였다. 이 소녀가 정순왕후이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렸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 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조선의 운명까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 줄은.


대혼날까지 이 소녀의 아버지 김한구는 벼슬하지 못한 유학(幼學) 신세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또 한 명의 척신(戚臣)으로 등장했다.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사위를 둔 새로운 국구(國舅, 왕의 장인)의 등장이었다. 딸이 왕비가 되면서 김한구는 궁중의 실세가 되어 갔다. 소녀의 오라비 김귀주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딸과 여동생 덕분에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김한구귀주 부자는 권력욕이 많았다. 권력욕이 많았던 또 다른 외척은 홍봉한인한 형제였다. 홍봉한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부친으로서 사도세자의 사건에 책임이 있었다.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은 노론의 영수로서 정조의 즉위를 영조에게 반박하며 기회를 보아 다른 인물을 추대할 속셈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기묘하게도 이 두 외척은 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 했다. 사도세자는 노론 중진들과 두 외척의 협공을 받아 영조 38년에 살해되고 말았다. 정조가 세손 시절, 할아버지 영조는 ‘나라의 중탁’을 손자인 정조에게 맡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아들 사도세자를 죽일 수 있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같은 이유로 남편을 버릴 수 있었다. 때문에 할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보지 못하며, 차마 말할 수 없다”는 삼불유훈을 내린 것이다. 이는 정조에게 뼈를 깎아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이었다. 궁중의 두 여인,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모두 사도 세자의 죽음을 안에서 호응했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제거한 후에는 두 외척의 자세가 달라졌다. 공동의 적이었던 사도세자가 사라지자 외척 가문 사이에 노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같은 노론 내에서 파벌이 갈린 것이었다.


이런 두 외척 전쟁하의 조정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세손 시절부터 정조의 숙원사업은 외척 제거였다. 영조 때 성장한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들이 수많은 비극의 뿌리라고 정조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정조는 척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척리에 관계되면 이 척리이건 저 척리이건 막론하고 꺾어 눌러야 한다는 것이 곧 나의 고심(苦心)이다”(『일득록』7). 영조 38년 사도세자를 살해한 후 극도로 비대해진 외척 세력이 이런 정조의 고심으로 즉위 반년만에 일단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외척은 발본색원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었다. 여전히 궁중 깊숙한 곳에 정순왕후와 혜경궁이라는 외척의 뿌리는 건재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다. 한 예로 자객을 동원해 정조를 시해하려하는 등의 모역사건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 조선 왕실의 비극이었다.


재위 1년(1777) 7월 28일. 깊은 밤이었으나 정조는 경희궁 존현각(尊賢閣)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밤늦게 책을 보는 버릇은 세손 때부터 생긴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살기 위한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대해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때가 또한 몇 달인지 알 수 없었다”(『정조실록』즉위년 6월 23일)고 토로했을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대낮에 암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암살 위협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밤중에 깨어 있는 것이었다.


밤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여름밤, 정조는 평소의 바람소리와 다른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그 시각에 보장문(寶章門) 동북 쪽 행랑채 지붕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 물체는 정확하게 존현각 지붕 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기왓장을 조심스레 뜯었다. 방안에는 정조 혼자뿐이었다. 호위 내관도 경호군사의 철야 근무 상태를 점검하러 나갔기 때문이었다. 인적이 분명하다고 느낀 정조는 방어 자세를 취하며 소리를 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정조의 고함소리에 내시들과 대궐문의 열쇠를 맡는 액정서(掖庭署)의 액예(掖隸)들이 몰려왔다. “지붕 위에 괴한이 있다.” 내시와 액예들이 지붕으로 올라가니 괴한은 사라지고 기와 조각과 자갈, 모래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자객의 흔적이었다. 궁내에 내통자가 없으면 수많은 전각 중에 임금이 자는 방을 알 수가 없을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로 밝혀진 것은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청(扈衛廳) 소속 군관이 자객의 길 안내를 맡았다는 것이다. 이는 궁중 세력이 깊숙이 결탁되었음을 뜻했다.


흑두봉조하 홍국영

영조 48년(1772, 임진년) 9월 26일. 홍국영은 세자시강원으로 향했다. 그해 치러진 정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홍국영은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로 임명받았다. 빠른 승진이었다. 세자시강원에 도착한 홍국영은 세손에게 큰 절을 올렸다. 세손이 20세, 홍국영이 24세였다. 홍국영은 세손에게 깃들인 용봉(龍鳳)의 자태를 보았다. 고립무원의 처지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의연함이 세손에게 있었다. 조정 동태에 민감했던 홍국영은 세손과도 촌수를 따지면 12촌 형제가 되는 셈이었다. 홍국영은 세손에게 인생을 걸어 볼 만하다고 느꼈다. 정조는 상견례 때만 해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이 미남자가 자신의 오른팔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조는 즉위 3일 만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정조실록』에 “특별히 발탁했다”고 적고 있듯이 이례적인 발탁이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영조 51년(1775년) 대리청정을 거처 정조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홍국영의 역할이 컸었다. 홍국영은 국왕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조정의 실권은 홍국영의 손아귀에 있었다.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이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 불과 서른이었다.


홍국영은 드디어 자신의 포부를 펼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은 두 가지 목표를 세워 놓았다. 하나는 두 외척을 제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론남인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소론과 남인은 고무되었다. 이제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도세자 사건의 재조사를 주장하는 상소가 올려지고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한을 되새겨 노론 치죄에 나서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소론의 연속 상소에 대한 정조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격렬하게 화를 냈던 것이다. 정조가 화를 낸 이유는 사도제사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맞은 모순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판정하면 영조가 그릇된 임금이 되고, 영조가 올바른 처분을 했다고 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런 모순 속에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보호하려던 소론 명가를 주륙했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거조였다.


정조는 왜 이런 거조를 보였을까? 그 배경에는 바로 홍국영이 있었다. 정조는 즉위 초 홍국영을 정치적 지주로 높이 평가했고 이렇게 말했다. “척리와 근습(近習, 임금의 총애받는 신하)들이 모두 딴마음을 먹고 있어 국가(정조)가 고립되어 위태롭게 되었을 때 국가를 보호한 것은 유독 홍국영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정조실록』즉위년 6월 23일). 정조는 ‘홍국영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준 것이다. 홍국영은 이 권한을 이용해 두 외척 집안을 제거하고 연속 상소를 올린 소론까지 제거한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홍국영의 정국 구상에 넘어가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홍국영은 명실상부한 집권 노론의 새 대표로 떠오르자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자신의 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조카에게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채 못 된 정조 3년(1779) 5월, 홍국영의 동생인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났다. 원빈의 죽음은 홍국영에게 큰 충격이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자 거의 이성을 상실했다. 혜경궁 홍씨는『한중록』에서 “제 누이 홀연히 죽으매 국영이 독살스러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누이가 죽은 내전 나인 여럿을 잡아다 칼을 빼들고 무수히 치며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는 비록 아이는 낳지 못했지만 조야의 폭넓은 신망을 받고 있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외척 때문에 고심하던 정조의 뜻에 순응해 일절 정사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런 왕비를 물증도 없이 핍박한 것은 많은 반발을 샀다.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 김씨 두 집안 역시 정조 즉위 후 친정이 몰락한 배경에 홍국영이 있다고 원망하던 차에 홍국영이 왕비를 압박하자 이를 빌미로 거세게 반발했던 것이다.


이런 반발에도 차기 국왕을 자신의 인물로 만들려는 홍국영의 야망은 꺾이지 않았다. 정조는 비로소 자신의 시각으로 홍국영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충심이 가득한 신하가 아닌 야망으로 가득 찬 한 인물이 보였다. 정조는 홍국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큰 물의 없이 홍국영을 처리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정조 3년 9월 26일. 이날은 홍국영이 세자시강원에서 정조를 처음 만난 지 7년 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홍국영은 이날 정조에게 먼저 떠나겠다고 선포했다. 자신이 구설에 오르게 된 것이 누이를 후궁으로 들인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홍국영을 ‘봉조하(奉朝賀)’로 봉하고 궤장을 내렸다. 봉조하는 자리에서 물러난 대신에게 내리는 것으로서 주로 노인들의 직책이었다. 청년 봉조하는 유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머리가 검다는 ‘흑두(黑頭) 봉조하’란 말이 생긴 것이다.


홍국영은 정조가 자신을 다시 부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홍국영을 향해 띄운 승부수는 홍국영의 사랑방이었던 조정을 홍국영을 성토하는 최전선으로 변하게 했다. 조정 복귀를 누린 홍국영은 자신에게 아부하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세태에 대해 마음속의 울분을 끝내 이기지 못했는지 정조 5년(1781년) 4월 5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불과 서른넷의 나이였다. 홍국영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뜻했다. 이제 비로소 정조는 홍국영의 구상이 아니라 세손 시절 수없이 꿈꾸었던 자신의 구상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정조시대의 개막이었다.


규장각 사검서, 시대를 주름잡다

유득공은 대사동(大寺洞: 큰절골, 현 종로 23가)으로 향했다. 과거 흥복사가 있던 자리에 세조가 원각사를 세운 것을 계기로 이 일대는 큰절골로 불렸다. 세조는 재위 11년 원각사에 흰색의 10층 석탑을 세웠는데 이후 이 탑은 백탑이라 불렸다. 유득공이 큰절골로 가는 이유는 이덕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덕무는 당대 제일의 학문을 지닌 선비였다. 장안의 양반 장서가들은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라면 어찌 책 구실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이덕무가 자신들의 책을 빌려갔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곤 했다. 영조 43년 이덕무가 백탑 부근으로 이주하면서 그와 친한 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으로 이주하거나 자주 찾게 되었다. 이덕무는 서얼이었기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도 대부분 서얼들이었다. 이덕무는 유득공보다 여덟 살 위지만 두 사람은 나이를 잊고 사귀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의 사이였다. 그러나 당대 제일의 학문을 지닌 이덕무의 곤궁함은 유득공의 가슴을 쳤다.


이덕무나 유득공과 같은 처지의 서얼은 더 있었다. 박제가도 그중 하나였다. 박제가의 흉중에는 수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습득한 경국(經國)의 지식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현실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가 정조 즉위년(1776)에 쓴『소전(小傳)』에서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독하지만 고고한 사람만을 골라 유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멀리한다. (중략) 백 세대 전의 인물에게나 흉금을 터 놓으며, 만 리 밖 먼 땅에나 가서 활개치고 다닌다.” 지금 조선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기에 독서를 통해 백 세대 전의 인물과 교유하고 만 리 밖 이국땅에 가서 활개치고 다닌다는 뜻이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으나, 서얼이란 이유로 세상의 쓰임을 받지 못하던 음지의 실력자들이었다.


백탑 부근에는 노론 가문 출신인 박지원도 이주해왔다. 영조 45년(1769), 박제가는 백탑으로 향하며 박지원을 만났다. 박지원의 나이가 서른셋, 박제가는 열아홉이었다. 자존심 센 서얼 박제가는 양반 출신 박지원을 굳이 찾을 이유가 없었으나 박지원은 여느 양반들과 다르고 문장도 특이하다는 이덕무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어 지금 막 처음 찾아가는 길이었다. 양반출신에 대한 박제가의 경계와 문장을 겨루고 싶은 호승심(好勝心)은 그러나 박지원을 처음 만나는 순간 봄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박제가가 왔다는 말을 들은 박지원은 옷깃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뛰어나왔던 것이다. 박지원은 어린 박제가의 손을 잡고 십년지기처럼 흔들었다. 박제가를 방으로 이끈 박지원은 자신이 지은 글을 모두 꺼내 읽으라고 주었다. 그리고는 몸소 쌀을 씻고 밥을 지었다. 노론 출신의 양반 사대부인 박지원이 직접 밥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박제가는 그의 문장을 읽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이렇듯 백탑은 양반과 서얼 출신들이 어울리는 신분 타파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시를 능숙하게 짓는 이 서얼들은 능력과 관계없이 신분제 사회의 그늘일 뿐이었다. 그 그늘 속에서 그들의 학문은 햇볕보다 빛났다.


그런데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 즉위한 정조가 서얼들의 등용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의 나라였다. 서얼들은 양반의 피를 타고났으나 서류(庶流)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다. 서얼들은 커다란 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바로 이 원한을 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정조는 재위 1년(1777) 3월 21일, 문관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와 무관의 인사권이 있는 병조에「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작성해 올리도록 명했다. 서얼들의 벼슬길 진출을 허용하는 법을 만들라는 지시였다. “아! 필부가 원통함을 품어도 하늘의 화기가 손상되는데 서류들의 숫자가 몇 억(億, 십만)정도뿐만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 중에 나라에 쓸 만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가 어찌 없겠는가? … 아! 저 서류들도 나의 신자(臣子)인데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정조는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가 발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또한 당시 조정 기구들로는 조선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조직인 규장각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조 3년(1779) 6월 초하루, 생각지도 못했던 전교가 내려졌다. 양반들도 선망하는 최고의 관청인 규장각에 서얼출신들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리수를 검서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4명의 검서관들은 이후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 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했다. 그간 신분제의 질곡에 얽매여 있던 이들의 재능은 규장각 검서관이란 날개를 달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들은 시대의 변두리에서 한복판으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시대의 변화였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들과 많은 일을 의논했는데, 이덕무와 박제가에게 이런 주문도 했다. “시경(詩經)에 ‘꼴 베고 나무하는 천한 사람에게도 묻는다’고 했다. 그대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이익이 되고 오래된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방도가 있거든 수시로 기록해 올리라”(『청장관전서』제 71권). 오래된 폐단을 제거 할 수 있는 개혁 방안을 이덕무나 박제가에게 묻는 이유는 분명했다. 정조는 명문대가 출신들에게서 개혁 방안이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개혁 방안은 이덕무나 박제가처럼 실력은 있으나 신분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인재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규장각 사검서는 단순히 이들의 처지를 동정해 등용한 것이 아니었다. 정조는 이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개혁 이론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과 자주 대화했던 것이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사검서로 등용되기 전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후 이덕무는『입연기』라는 기행문을 쓰고 박제가는 기행문 대신『북학의(北學議)』를 썼다. 박제가는『북학의』에서 조선 지식인들이 내심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청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배우자고 했다. ‘북학파’는 이런 혁명의 인식의 전환에서 생겨난 실학파였고 백탑파는 곧 북학파였다. 박제가는 허식에 사로잡힌 조선 사대부들과는 달랐다. 서얼 출신이었기에 조선 사대부들과 다른 시각으로 청나라를 볼 수 있었다. 박제가는 평소에 자신의 지론이었던『북학의』를 정조에게 올렸다. 박제가에게 북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서얼 출신 박제가가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던 경세의 꿈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품어 온 꿈과 같은 것이었다. 사검서와 정조의 신분은 크게 달랐지만, 이처럼 꿈은 같았다. 그렇기에 사검서는 정조의 또 다른 동지들이었다.


남인과 천주교

정조 9년(1785) 봄, 형조의 금리(禁吏)들은 명례방(明禮坊, 명동)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계속 들락날락거리는 그 집은 역관 출신 김범우가 사는 곳이었다.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한 금리들은 증거를 잡기 위해 김범우의 집에 몰래 잠입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예상했던 노름판이 아닌 이상한 의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반 차림의 한 사내가 방 한가운데에서 의식을 집전하고 있었다. 이벽이었다. 그의 뒤쪽 벽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금리들은 잠시 망설였다. 중인집이었지만 모인 인물들은 양반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약간 망설이던 금리들은 현장에 진입했고, 화상(畵像)과 서적들을 압수해 형조에 바쳤다.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었다. 조선 천주교인 실체가 추조(秋曹, 형조)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도성 한복판에 천주교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으로 조야(朝野)에 큰 충격을 주었다. 노론을 중심으로 천주교 금압 주장이 높아갔다. 이 의식에 참여한 양반들은 모두 남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들이라고 모두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이익의 제자이자 권일신의 장인이었던 안정복은 정조 9년에 쓴『천학고(天學考)』와『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천주교를 사학이라고 비판했으며, 이가환도 이벽의 끈질긴 설득을 뿌리치고 천주교 입교를 거부했다. 남인 일각에서 천주교 문제를 가문과 당파 차원에서 다룬 것은 그 교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적 고려가 내포되어 있었다. 정조 시대를 맞아 남인의 오랜 불운이 끝나고 정계에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천주교 문제는 이런 고조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었다.

남인들의 우려대로 천주교 문제를 남인 제거용으로 이용하려 한 것은 집권 노론이었다. 정조의 후의로 세를 넓히고 있는 남인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노론은 천주교가 정조와 남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소재임을 간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정치적이 아니라 사회적․ 철학적 차원으로 접근했다. 실록에는 이렇게 전한다. “정학(正學)이 밝아져서 사학(邪學, 천주교)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대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나라초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급선무이다. 사대부 중에 한 사람도 오염되는 이가 없으면 화복설에 흔들린 어리석은 백성들도 스스로 깨닫고서 깨어날 것이니, 조정에서 이 일에 많은 힘을 쓸 필요가 없다”(『정조실록』12년 8월 6일).


정조는 천주교를 이용하려는 노론의 정치적 음모를 잘 알고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천주교를 허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창안한 논리가 ‘정학이 바로 서면 사학은 저절로 소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노론에 대한 역습이기도 했다. 성리학을 정학으로 신봉하는 노론 인사들이 바로 서면 사학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학이 성행하는 것은 성리학자들의 처신이 바르지 않아서라는 말이었다. 정조는 이런 논리로 천주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금압 요구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