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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창문베다니 은혜의 창문(8-24-08) 십일조-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재정 계획 Tithing--God's Financial Plan For You By John H. Ogwyn 박정순 집사 역 재정 문제는 많습니다. 개인의 부채는 전례에 없는 높이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월 말이 가까워지면 우리의 돈이 너무나 모자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일입니까? 자연과 발전된 자원이 거대한 이 부한 나라에서 비교적 넉넉한 봉급을 받는 자들조차 가끔 간신히 수지를 맞추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재정적 어려움은 결혼 생활에도 많은 시련을 줍니다. 재정에 대한 우려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마음의 평화와 건강 까지도 잃게 됩니다.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이 소유하고 있는 일부를 남에게 주면 곤경을 벗어 날수 있다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성하였다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할 것이며 만일 저들의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의 일에 들이게 되면 저들은 더 심한 재정적 속박을 받게 될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 입니까? 만일 재정적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자가 십일조를 시작 한다면 말이 됩니까? 사실은 다른 어느 것도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점을 잘 묘사한 실례가 성경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BC 6세기에 유다의 거민들은 많은 고초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세기 초반기에 바빌론 사람들이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파괴하였고 거의 모든 유다 인구는 남부 매소 포타미아로 추방 되었습니다. 그들은 낯선 그 땅에서 수십 년간 간신히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파괴 후 50년도 되기 전에 메대-바사 왕 고레스의 군대가 바빌론을 침략하였고 비교적 단기일 내에 바사 왕 고레스는 유다에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복귀를 허락하는 법령을 발포하였습니다. 수천명의 유대인이 총독 스릅바벨과 대재사장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바빌론으로부터 복귀하였습니다. 최초에 그들은 그들의 성전과 나라를 재건할 기회를 얻은 것에 흥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어떤 근방 사람들의 반대에 부닥치게 되었고 또 그들에 대한 거짓고발이 바사 법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은 중지되었고 수년이 지났습니다.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허물어진 국가와 경제를 재건하려 하는 매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너무 많은 어려움에 접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할 올바른 때가 아니라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선지자 학개가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에게 경고를 주게 된 배경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이루기를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루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이때에 판벽 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들은 자신의 소위를 살펴볼 찌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 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 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 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려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 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학개 1:2-10)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회피 할 수 있을 때가 오자마자 바로 그 일을 중지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일을 거꾸로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이실 때 모든 것이 꼭 들어맞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전체를 통하여 분명한 원칙의 하나는 하나님을 최후로 돌리면 사실상 아무도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2: 37) 그 외 다른 것은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첫째 우선순위로 자신을 보호하고 공급하려고 노력할 때 모든 사람이 고안한 축복을 제쳐놓은 전략은 결국 무효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육체적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6:33) 우리는 성경이 십일조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배우고 우리들 각자를 위한 하나님의 재정적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주다"의 동적 법칙 (The Dynamic Law of Giving) 근래에 금전 관리의 원리를 취급한 책과 잡지가 번성하고 있습니다. 많은 책은 저축 혹은 투자를 장려하나 또 다른 책은 어떻게 여러분이 소득력을 높일 수 있을까 혹은 이미 가지고 있는 달러를 어떻게 늘릴 수 있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출처들의 많이는 어떤 재정적 원리에 약간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비록 있다 하여도 소수만이 가장 가치 있는 원리에 접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주는 것에 대한 신의 법칙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라 하셨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이것이 어떻게 번성하는가 라는 문제와 아주 반대가 되는 것 같이 들릴 것입니다. "나는 벌 서 너머 돈 사정이 좋지 않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를 남에게 주면 나는 더 적은 것을 갖게 되고 더욱 심한 재정적 고난을 당할 것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견지에서는 순전히 건전하게 보일지 모르나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운동의 법칙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칙의 하나는 "주다"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은 행복, 성취, 진정한 번성을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주다"의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는 열쇠는 십일조를 아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수입의 10%를 하나님께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창조주를 존경하는 적절한 통로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라 알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14:19-20,28:20-22) 시내산과 레위 제사장의 설립보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놀라운 법칙이 작용되는지요? 간단히 말해서 십일조를 함으로 개인의 재정적 혹은 영적 일에 신의 개입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시작할 때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하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이 말라기에 나오는 진술은 만일 순종하면 육체적, 영적 양면에서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살아있는 법칙입니다. 이 복들 중 어느 것은 수입의 증가 또는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를 포함합니다. "하늘 문"을 여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또 영적 축복 즉 신의 보호와 늘어가는 믿음, 평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등을 포함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는 자는 하나님보다 더 줄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 영적 양면의 축복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초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만큼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나를 시험하라"고 도전 하십니다. 흥미 있는 것은 선지자 말라기는 백성들이 극심한 재정적 곤경에 빠져 있을 때 그들에게 이 도전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재정적 저주 앞에 있었습니다. (말3:9) 말라기는 그들이 넉넉하여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십일조를 시작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대한 그들의 자기중심적 방법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앞에 세울 때까지 그들의 입장은 결코 호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외향성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고후 9장에 기록된 지시에 주목해 보십시오. 고린도 형제들은 유다가 가뭄과 기근으로 황폐되었음으로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해서 특별선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관대할 것을 권고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이것이 곳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들의 주는 자로서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 하시느니라" (고후 9:7) 하셨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주는 것을 실행하고 외향성 관심을 갖게 되면 풍부한 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람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는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의 일부는 그가 충실하게 구제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행 10:4,31) 그래서 그는 세례를 받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지도를 받았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충실하게 찾고 그는 참 하나님에게 기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또 그는 구제하는데 관대하였습니다.(행 10:2) 하나님은 그의 일로서 증명한 고넬료의 태도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보여 주도록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주는 방식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게 될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잠11:24-25)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것이 더 많은 복을 받는다 하신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면 큰 기쁨과 많은 육체적, 영적 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게 될 것 입니다.(시 34:8) 그는 좋으신 분이 십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의 십일조는 우선 순위를 가르친다 창세기서 에서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풍습적 실행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만 모세를 통하여 법으로 주셨을 때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특별한 지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지시도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이해함으로서 우리는 십일조를 결정하는 원칙을 확인 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현시대에 맞추어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수입에 따른 3가지 명백한 십일조를 지시 하셨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보류하셨고 레위 제사장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백성들이 일년에 세 번 오는 절기 때마다 여호와 앞에 나타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둘째 십일조는 따로 떼어두었다가 절기가 오면 쓰도록 하셨습니다. 셋째 십일조는 성읍에 사는 매우 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 성중에 우거하는 객)을 구제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명백하게 하나님께서는 농산물의 첫 열매를 첫째 십일조로 자신을 위하여 따로 떼어 두셨다가 그것을 하나님을 직접 대리하는 자들에게 지불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모든 가족과 함께 절기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를 경배하고 줄기 기 원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재정적 준비를 하도록 지시 하셨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섬기며 언제나 우선권에 대한 바르고 균형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을 반영 합니다.
농업사회에서 들이는 십일조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는 주로 무현금 경제였으며 압도적인 대다수의 백성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십일조에 관한 특별한 지시도 이와 같은 형편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곡물과 동물의 십일조는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곡물은 심은 씨의 양을 제외한 수확된 곡식의 십 분의 일을 레위에게 지불하면 되었습니다.(민18:21,신14:22) 동물의 십일조는 그 해에 난 어린 가축을 우리 문으로부터 막대기 아래로 통과 시키면서 열째마다 붉은 페인트를 발라 표시한 것을 십일조로 레위에게 들였습니다.(레 27:32) 레위인들은 이 받은 십일조로 예루살렘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곡식과 과일에 대한 둘째 십일조도 이와같이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다르게 취급하였습니다. 각 어미 동물의 처음 난 것은 따로 떼어두어 이는 하나님께 봉헌하며 수컷은 제사장들에게 암컷은 각 가정에서 절기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서 즐겨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들이는 것 외에 각 추수 때 곡류, 무화과, 포도, 올리브등의 첫 익은 소산물의 일부를 오순절과 초막절 사이에 예루살렘 제사장들에게 드립니다. 이 첫 익은 곡식들은 보통 한줌 또는 한 조그마한 광주리에 담아 감사의 예물로 들입니다.( 민 18:12-13)
신약 교회 시대와 십일조 제 일세기 유대인 사회는 십일조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고도의 관심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마23:23, 눅18:12) 유대인은 누구에게 십일조를 지불하였습니까? 물론 율법의 지시에 따라 레위 제사장들에게 들였습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십일조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하였는지요? 레위 제사장 시대와 신약 교회 행정 사이의 과도기에 살고 있던 신자들에게 이 문제는 명백한 성경적 설명이 필요하였습니다.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성전 의식에 계속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성전과 이에 관련된 모든 것은 일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이에 관계되는 문제를 취급하기 위하여 히브리서를 썼습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레위행정은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달으시는 시작이나 끝을 상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을 통하여 바울은 다른 모든 종교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점진적인 성직자 직이 탁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바울은 이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실례로 사용하였습니다. 히 6:20 에서 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설명한 후 7장에 계속하여 레위보다 멜기세덱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레위들은 율법에 따라 백성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도록 계명을 받았으나 그들이 처음으로 십일조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함으로서 레위 직보다 더 우수한 성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이 뒤늦게 온 레위의 성직보다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어떤 점에서 레위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십일조를 지불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히7:9)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지불할 뿐 아니라 또 그에게서 축복을 받은 것을 확정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멜기세덱 성직이 레위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 후 바울은 이에 따른 율법의 변화의 필요성을 논하였습니다. 성직은 일반 백성들과 여러 가지 점에서 돋보이게 합니다. 그들의 혈통을 통해서, 그들만이 제단에서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것,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재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 의식을 주재하며 그들만이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받도록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 등 입니다. 히 7장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하였고 혈통으로는 유다로 좇아 나셨다. 제사장의 권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토록 계속 제사장 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오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첫째로 그 자신을 먼저 희생물로 드리시고 지금은 그에게 오는 자들을 위하여 영원토록 사시면서 중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히7:24-28)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으로서 레위 제사장이 존재하기 전에 십일조를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신약 시대에도 제사장직의 역할은 계속할 것이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멜기세덱 제사장직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충성된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크리스찬들은 멜기세덱의 역할을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13-14에서 바울은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시대 행정 하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성직은 복음을 열심히 세계에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성직은 옛 레위 제사장직과는 달리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십일조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 같이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입니다. 진정으로 구하는 참된 부(The true riches) 오늘날 거의 모든 세상에서 인생의 길은 물질주의인 듯 보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메스컴이 "부하고 유명한 인사들"의 생활양식을 묘사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각에 호소하는 것은 돈과 사치를 행복이라 해석하는 거짓 개념이라고 재차 시인하게 합니다. 이는 사실과 너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행 중 한 도시를 지나가실 때에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군중이 그의 주의에 모였습니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부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눅12:13).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에 주목 하십시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14-15) 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어로 Pleonexia(탐심)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보다 더 많이 갖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산에 관한 율법에 위하면 아마도 그가 받을 공평한 몫보다 더 많은 것을 형에게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관계없이 예수께서는 그 젊은 사람에게 탐욕적인 태도가 있는 것을 분별하시고 풍성한 수확을 맞이하여 문제가 생긴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의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눅12:17-19) 이 부자는 자기만을 생각하며 풍부한 수확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며 부족해 하는 이웃을 전혀 무시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부자는"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며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하라"(디전6:18) 라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자기중심인 생활 방식에 집중하고 있음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0-21)고 하셨습니다. 재산에 대한 논쟁의 질문이 있은 후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께서는 여기에 관련된 사람의 태도를 확실히 분별하셨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세상일과 더 많이 얻으려는데 마음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을 보시고 보통 사람의 추세에 대해서-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힘쓰는 것 보다 지금 이곳에서 얻고 갖는 것에 흥분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발견하시게 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 이를 잘못 풀면 우리의 생활의 모든 점에서 잘못된 우선순위를 이끌게 됩니다. 오늘날 서부 세계에서 많은 가족들이 물질주의라는 제단으로 그들의 자녀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므로 많은 물질을 갖고자 합니다. 우선순위는 위험하게 빗나가고 사회는 무서운 대가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이 부한 것도 풍부한 수확을 걷은 것에 대해서도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하지 못한 것을 비난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그 부자의 풍부한 소출이 그의 신-그의 신뢰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찾는 문제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6:9-10). 이 성경 말씀들은 예수께서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셨는지 분명하게 합니다. 탐욕은 그의 생명 그리고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바로 그의 영생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첫째 목적이 "부"라 할 때 그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타협과 죄에 유인을 당하게 됩니다. 수 천 년을 통하여 물질적 부를 추구하기 위하여 사실상 하지 않은 일이 없고 또 깨지지 않은 계명이 없습니다. 풍부한 부와 소유물이 우리들에게 거짓 안정감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를 협박하는 주식 폭락, 사업의 실패, 인플레이션, 여러가지 다른 위기들은 큰 근심을 초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부를 안전보장의 근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강박감을 느끼며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현명한 솔로몬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전5:12)하였습니다. 참된 크리스찬은 이세상의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부에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다만 한 분이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믿음을 두고 있는지 인생에서 우리의 참된 우선권이 어디 있는지 아시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우리가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마6:33)고 하셨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부는 영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진실한 영적 부는 산 믿음과 경건한 의 입니다. "이는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딤전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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