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 은혜의 창문(8-17-08)


신념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

윌버포스

(가트 린 지음)



CHAPTER 1 사람이 사람을 판다는 것


이 사람들은 상품입니다

대부분 유럽 국가가 참여하고 있던 노예무역은 영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를 통해 10만 명의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을 실어 날랐으며, 1783년부터 1793년까지 리버풀의 노예선만 약 30만 명의 노예를 서인도 제도로 실어 날라 1천 500만 파운드(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억 5천만 파운드)에 팔아넘겼다. 리버풀, 브리스틀, 런던 등을 출발한 영국 선박들은 서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해서 노예들을 직접 사로잡거나 아랍 상인한테서 매입하거나, 비정한 마을 추장들과 물물 교환을 통해 노예를 확보했다. 특히 영국에서의 노예무역은 1600년대에 국왕의 칙허와 의회의 법령으로 합법화되었으며, 노예무역에 관련된 국가적인 투자 실상을 1791년 리버풀의 의원이었던 탈턴 대령의 언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무역은 순식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 무역 때문에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이 고용되고, 약 160척의 배가 사용되었으며, 수출 물량도 8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서인도제도의 무역도 파국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출량과 수입량은 거의 600만 파운드에 달하며, 약 16만 톤의 선박과 수만 명의 선원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예선의 구조를 보면 내부 높이가 7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으며, 사람이 먼 바다를 항해하기에는 견디기 힘든 최악의 환경이었다. 어느 때는 150톤짜리 배에 500명의 노예가 짐짝처럼 실리기도 했는데, 강제 징집되어 복무 중인 승무원들은 여자 노예를 마음대로 골라 성폭행을 자행했다. 항구에 도착해서 노예 시장으로 끌려온 노예들은 발가벗겨 거리를 행진하도록 강요되었고, 행진이 끝나면 경매에 붙여졌으며, 건장한 남자는 40파운드 정도의 값으로 흥정되었지만, 병들고 부상당한 노예는 여자나 아이와 함께 묶어 패키지 상품처럼 팔려나갔다. 노예의 가족들은 이렇게 흩어졌으며, 병들어 팔리지 않는 노예들은 부두에 버려진 채 비참하게 죽어갔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 3분의 1 정도가 새 주인의 혹독한 채찍을 견디다 못해 죽어갔는데, 그들은 이 과정을 ‘순화교육’이라고 불렀다. 


작은 항거

당시 나라 안에서 비인도적인 처사가 횡행하고 있던 시대였으므로 눈에 뜨이지 않았던 노예들의 처참한 참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퀘이커 교도와 같은 신앙인들에 의해 노예무역 폐지에 대한 운동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밑에서 노예무역의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는 했지만,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본격적이고 노골적인 반대운동은 1783년 노예선 ‘종(Zong)’에서 벌어진 잔학 행위가 폭로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종이라는 노예선은 대서양 중앙 항로에서 길을 잃었는데, 이 과정에서 노예 60명과 선원 7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식수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선장은 배의 안전을 유지하고,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을 지급받을 목적으로 132명에 달하는 노예를 물속에 던져 바다에 강제로 수장을 시켰다. 이 중에서 단 한 명의 노예가 살아남았고, 이 노예를 통해서 당시 노예무역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던 관청 서기 그랜빌 샤프가 그 끔찍한 참상을 전해 듣고 영국 사회에 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노예무역 반대 운동이 노골화된 것이다. 당시 영국 정부의 입장은 선장이 노예들을 바다에 던진 행위는 배의 안전을 위해 상품이나 가재도구를 바다에 버린 것과 같다는 매우 잔인한 논리를 펴서 선장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합법화시키고자 했지만, 영국의 전 퀘이커 교도들이 단합해서 최초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랜빌 샤프가 회장이 됨으로써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큰 규모로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노예해방을 결정적으로 마무리할 인재가 숨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영국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였다.


CHAPTER 2 정치계의 샛별 윌버포스


초선 의원이 되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윌버포스는 친구이자 동기인 윌리엄 피트(24세에 영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수상에 오른 정치인)와 매우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정치적인 과정을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승기류가 되어주었던 윈윈 관계의 전형이었다. 윌리엄 피트는 윌버포스보다는 덜 사교적이었지만 야심이 크고 재능이 탁월한 인물이었으며, 윌버포스는 160센티미터의 신장에 85센티미터의 가슴둘레의 작은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위트와 해학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고, 어떤 장소에서든지 화제를 주도할 정도로 탁월한 사교술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노래 솜씨는 천하일품이었는데, 영국 황태자는 그의 노래를 듣고 반한 나머지 “윌버포스가 노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것이다”라고 윌버포스의 노래솜씨를 극찬했다. 


윌버포스와 윌리엄 피트는 불과 21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의회 의원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윌버포스는 헐에서, 피트는 케임브리지에서 출마할 것을 결심했는데, 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행할 수 없는 큰 결단이었다. 당시 헐 선거구의 선거 양상을 보면, 영국의 명문가인 휘그 가문의 출신 데이비드 하틀리, 러틀랜드 공작의 삼촌인 로버트 메너즈 경과 윌버포스 3파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선거구의 주민들은 샛별처럼 나타난 윌버포스에게 주목했으며, 선거구 주민들은 윌버포스의 매력과 그의 탁월한 연설 능력, 그리고 재력을 매우 능률적으로 이용해 선거구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의 인간미에 마음을 열고 매너즈 경과 함께 윌버포스를 의원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피트는 케임브리지에서 낙선해 잠시 힘든 상황에 처해졌지만, 석 달 뒤 애플비라는 ‘부패한 선거구’를 통해 의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크셔의 영웅

1784년 무렵 윌버포스는 무모하리만큼 큰 야망을 품었는데, 요크셔 주의 두 개 의석 중 하나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요크셔는 영국의 여러 주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했으며, 그 때 까지 윌버포스와 같은 상인 계층 출신 의원들은 어느 누구도 대지주들의 관할 아래 있는 요크셔 주의 의석을 차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1779년 요크셔 주에서, 의회를 개혁할 목적으로 ‘요크셔 협회’가 조직되면서 요크셔 협회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 협회는 지주 계층의 성직자인 크리스토퍼 위빌이 주도했다. 위빌은 윌리엄 피트를 개혁의 최대 희망으로 생각하고 요크셔 주에서 총선을 실시하기를 원했으며, 이때 윌버포스는 피트를 돕기 위해 마차를 타고 요크셔로 갔다. 당시 요크셔의 두 의석은 피트 파의 던쿰과 휘그당의 폴리엄이 선출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윌버포스가 이 요크셔 주의 의원이 된다는 것은 아무도 기대하지도 않았고, 가능성마저 생각해 본 사람이 없었다.


총회가 열리던 날, 그곳에 무려 4천 명에 달하는 자유민이 모여들었으며, 이 거대한 자유민의 모임을 상대로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열두 번의 긴 연설이 이어졌다. 청중이 지쳐가고 있을 무렵, 키가 16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의 체구의 윌버포스가 연설을 위해 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 윌버포스의 당시 모습을 제임스 보즈웰은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새우였습니다. 그런데 그 새우가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고래로 변했습니다”라고 그때의 윌버포스의 모습을 묘사했다. 윌버포스는 거기에서 행해진 어떤 연설보다 가장 논쟁적이고 유창한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으며, 청중들은 그의 탁월한 웅변에 크게 감동을 받고 윌버포스를 대대적으로 환호했다. 그날 피트 파에서는 윌버포스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움직임이 형성되었으며, 이와 같은 의외적이고 돌연한 변화는 그날 윌버포스가 피트를 돕기 위해서 쏟아놓은 웅변 때문이었다. 이 총선은 결과적으로 피트 파의 사람들, 던쿰과 윌버포스를 승리자로 만들었으며, 윌버포스는 갑자기 영웅이 되었다. 이제 윌버포스는 요크셔의 의원으로서 유력한 인물이 되었으며, 당시 24세로 영국 정치사상 최연소로 수상이 된 피트와 절친한 사이라는 것과 그의 뛰어난 연설 능력 때문에 그의 자리는 더욱 탄탄해져갔다. 어느 기자는 윌버포스의 연설에 대해 “그의 발언은 분명하고 운율이 있어 아무리 적대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즐겁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연설은 쉽게 사람들의 환심을 사곤 했는데, 그의 말이라면 아무리 허튼 소리를 한다 해도 들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했다”고 피력했다.


CHAPTER 3 터닝 포인트


깨달음 

오직 정치인으로서 모든 열정을 거기에 쏟고 달려온 윌버포스에게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윌버포스의 목표를 완전히 수정하게 만들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윌버포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만나게 되었다. 무신론자였던 윌버포스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신앙이 그의 정치 생애와 인생 전반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윌버포스가 그의 누이 셀리의 건강 문제로 리비에라(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해안 지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사촌 베시 스미스,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감이 된 조지프 밀너의 동생 아이삭 밀너가 윌버포스와 함께 동반했다. 밀너는 니스에서 사촌 베시가 보고 있었던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에서 종교의 부흥과 진보』라는 책을 윌버포스와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윌버포스는 이 책에 대해 비상한 흥미와 관심을 기울였다. 밀너는 그 책에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거나 어려운 난제를 가지고 윌버포스와 토론을 하면서 윌버포스를 신앙의 영역으로 이끌기 시작했고, 1785년 2월 다우닝가 10번지에 도착할 무렵에 윌버포스는 이미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그가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이 될 것이다. “내게 영향을 준 것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무시해 온 것에 대한 커다란 죄의식이었다.”


생활의 변화

이제 윌버포스는 공적인 생활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성공을 향해 달리는 데 도움이 되었던 생활 방식에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또한 그런 변화가 친구들이나 선거구민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존 뉴턴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조국의 유익을 위해 키워진 것이라면 목표를 새롭게 수정해야 하는 걸까? 회심이후에 18개월 동안 이런 의문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785년이 결단의 해였다면 1786년은 갈등의 해였던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질문들은 윌버포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상류층 인사가 모이는 다섯 개 클럽에서 탈퇴하고 도박과 춤을 끊었으며, 또한 당시 타락 일로로 흘러갔던 연극 극장에 가는 것도 중단했다. 한편 그의 정치 생활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는데, 온건한 의회 개혁을 좀 더 진척시키는 법안과, 인도주의적인 법령을 상정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은 회심의 파문이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보여준다. “성공했다고 할 만한 성과가 아무것도 없었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이 내가 바라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누이에게 “진지함이 인생의 본업이라면 쾌활함은 인생의 휴식이 되어야 하며, 나는 인생이라는 말에 쾌활하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형용사를 붙이겠다. 나는 그것을 파괴할 수 없는 평온함, 고요함, 침착함이라고 부르고 싶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신앙생활을 통해 그의 내적인 세계가 얼마나 큰 변화를 겪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윌버포스의 변화 중 또 하나의 변화는 그가 지적인 욕구를 채우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낭비한 세월을 보상하기 위해 몽테스키외, 블랙스톤, 애덤 스미스, 로크, 포프, 새뮤얼 존슨의 글을 애독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책보다 몰입했던 책은 성경이었다. 신앙은 이제 그의 생활 속으로 넘쳐흐르는 힘이며, 그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버팀목이 되었다.


두 가지 신념

찰스 미들턴(해군 감사관) 경은 서인도 제도에서 브리스틀의 노예선인 스위프트 호를 체포해 자신의 외과 의사인 레임스 램지에게 노예선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조사를 벌이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 조사 과정에서 찰스 미들턴 경과 램지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예들의 끔찍하고 참혹한 실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1786년 가을,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여론이 사방에서 일기 시작했을 때 미들턴 경은 이 노예선의 참상을 정치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을 모색하던 중, 부인의 권고에 따라 의회의 후원자 명단을 살펴보다가 윌버포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미들턴 경은 이 심각하고 엄청난 인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자, 그러면서 경건과 정의감을 갖춘 도덕성 높은 인물, 그리고 옳은 일을 위해 소신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감한 영웅이 아니면 안 된다고 판단했으며, 윌버포스가 바로 그런 인물임을 확신한 것이다. 미들턴 경은 윌버포스에게 즉시 편지를 띄워 윌버포스만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적격자임을 호소했다. 윌버포스는 찰스 경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이 문제에 깊이 골몰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친구 피트가 “윌버포스, 자네가 노예무역 폐지라는 주제에 대한 동의안을 의회에 한번 제출해보지 않겠나?”라고 물어오자, 이 질문이 윌버포스의 심경에 충격파를 일으키면서 노예무역 폐지는 바로 윌버포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지상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윌버포스는 조국인 영국이 도덕적으로 순결해져야할 필요성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는 점점 더 큰 무게로 자기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한 자신의 헌신에 대해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예무역 폐지와 같은 비이기적인 전투는 하나님과 세상 앞에 관습 개혁, 곧 도덕적 개혁과 일직선상에 있는, 영국인이 동시에 이루어야 할 양심적이고 신앙적인 대 명제이기 때문이다. 윌버포스는 이 두 가지 운동을 동시에 수행하기로 결심했고, 1787년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윌버포스가 두 가지 신념의 기치를 높이 쳐 든 것이다.


CHAPTER 4 인간의 권리를 되찾다


노예무역 폐지 프로젝트

당시 정부에서 입법화한 ‘종 법안(The Zong case)’은 노예들은 단지 소지품에 불과하며, 노예선 선장은 ‘잔인함이나 부당하다는 생각 없이’ 임의적으로 노예를 바다에 던져 버릴 수 있는 불문의 법적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와 같이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법이 합법이라는 가면을 쓰고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는 처사에 대해 윌버포스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운동을 펼칠 것을 결심했다.


1787년 윌버포스와 동료들은 의회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퀘이커 교도의 노예무역 폐지 위원회에 자문을 구함으로써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했는데, 윌버포스는 버크, 피트, 폭스와 같은 실력자들을 등에 업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지만, 동의안은 88대 163으로 부결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노예무역 폐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인도주의적 입장에 선 의로운 사람들 보다 자기들의 이기적 만족을 위해서는 인간 존엄성 같은 것은 가볍게 희생할 수 있다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세력이 더 강했던 것이다. 그 이후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의회에서 연속적으로 부결되었는데, 그 과정을 보면, 1797년에는 74대 82, 1798년에는 83대 87, 1799년에는 54대 84의 패배, 1804년에는 하원에서는 124대 49로 이겼으나 상원에서 패배, 1805년에는 70대 77로 패배를 당했다. 이 정도의 좌절을 맛보게 되면 손을 들만도 했지만 윌버포스는 갈수록 결심이 굳어졌으며, 폴록은 이런 윌버포스를 보고 “그의 마음속에는 ‘강철 스프링’이 있다”고 경탄하는 심경으로 윌버포스를 평했다.



노예무역폐지를 위한 법률

1804년 9월, 윌버포스는 피트에게 압력을 가해 영국이 점령하게 된 네덜란드령 기니(Dutch Guinea)에 노예반입을 금하는 칙령을 내리게 하고, 노예를 영국 배에 실어 외국의 식민지나 전쟁 중 영국에 합병된 식민지에 들여오는 것을 금지하는 새 법안을 마련하게 하는 등 주변 사안부터 점진적으로 처리해 나감으로써, 그 후속타인 노예무역 폐지라는 본격적인 프로젝트 성취를 향해 계획을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몰고 갔다. 드디어 1806년 피트가 죽은 그 해 6월 10일 폭스는 첫 조치를 취했는데, 그가 상정한 결의안이 상하 양원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윌버포스는 “만약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폭스의 건강을 지켜 주신다면, 내년에는 우리의 수고가 마무리되어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1807년 1월 2일, 수종이 악화되어 죽음으로 몰려가고 있었던 폭스는 노예무역 폐지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 ‘수종이 가하는 통증’을 참아내면서 마지막 사력을 다해 그 법안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하고,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법률’을. 상원에서 수상의 동의를 받고 읽어 내려갔다. 첫째 항은 “5월 1일 이후로 아프리카의 노예무역과, 노예를 구입하거나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나 다른 영토로 노예를 운송하는 과정에서 노예를 거래하는 모든 방식이 완전히 폐지되고 금지되며 불법적인 것으로 선언된다.” 둘째 항은 “그 이후로 영국 배가 노예무역에 종사하면 어떤 배라도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날 표결 결과는 윌버포스에게 생애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했는데,  283대 16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노예무역 폐지안이 통과됨으로써 그 길고 험난한 투쟁이 위대한 승리로 끝난 것이다.


모두가 원했던 사람

윌버포스가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해 수고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사람인 동시에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영국 국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영국의 이미지를 쇄신해서 이타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되었다.


1823년 3월 윌버포스는 의회가 노예를 해방하도록 기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함으로써 투쟁을 다시 시작했다.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확정되었지만 노예들은 노예제도라는 ‘합법적인 굴레’에 고통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윌버포스의 뒤를 이어 노예폐지 운동 본부를 맡고 있었던 토머스 파월 벅스턴은 1825년 2월 윌버포스가 의원직에서 사임한 후에도 해마다 노예 제도 폐지 법안 동의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 당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의견은 전국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윌버포스는 허리까지 굽고 시력까지 약해진 상태였으며, 목소리조차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는 의회에서 사력을 다해 노예제도 폐지의 절대성을 설파했다. 그가 연설을 끝내자 갑자기 한 줄기 강한 빛이 의회의 홀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참으로 경이롭고 신비로운 광경이었는데, 그는 이 빛을 보면서 격한 감동에 휩싸여 ‘하늘에서 온 이 빛은 성공의 전조’라고 외쳤다. 그 후 윌버포스는 병세가 악화되어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꺼져갈 때,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병상에서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의회가 ‘대영제국에 있는 모든 노예를 1년 안에 해방시키라는 법령을 포고하고, 그 후 노예들이 이전 주인을 7년간 도제로서 섬겨야 하며 노예 주인들은 보상비로 총 2천만 파운드를 받게 되었다’는 낭보였다. 이 소식을 병상에서 전해들은 윌버포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살아서 영국이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기꺼이 2천만 파운드를 주는 날을 보게 되다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감격스러운 승리는 그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무려 150번의 의회 논쟁을 통해서 이룬 일이며,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 지 56년 만에 성취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왜소한 단신의 영웅, 그러나 진정한 거인 윌버포스는 1833년 7월 29일 새벽 3시에 조용히 눈을 감고 74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CHAPTER 5 신념으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다


지나친 사치 그리고 끔찍한 굶주림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거대한 전투를 진행하면서도 윌버포스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셨다’고 믿는 두 번째 ‘커다란 목표’를 잊지 않았다. 바로 영국의 관습, 즉 도덕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노예무역 폐지 운동 못지않게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이 분명한 것은, 당시 영국을 통치하던 귀족 계급은 관습을 최고의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존 말로의 지적은 영국의 정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이 될 것이다. “영국의 정치 생활이 뇌물로 얼룩진 것은 영국 지배층이 보이던 사회생활의 난잡함과 방탕함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거기에는 돈으로 매수하는 것보다 훨씬 혐오스러운 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정함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정치는 정치적 ․ 사회적 ․ 도덕적인 면에서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타락해 있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사회는 역사가 트리벨리언의 표현대로 사회가 ‘하나의 카지노’였으며, 당시 젊은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가지고 브룩스 클럽에서 도박으로 탕진을 하고, 쾌락이라는 탁류에 스스로를 내던져 본능과 유희의 노예로 살았다. 1787년 존슨의 유저(遺著) 관리자였던 존 호킨스 경은 “극장과 그 주변 지역은 악의 온상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어느 지역이든 극장이 문을 열면 즉시 매춘굴에 둘러싸였다”라고 말했다. 교양과 방탕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녔으며, 부자들은 고급 포도주에 잠겨 세월을 낭비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싸구려 독주에 취해 거리는 주정뱅이로 넘쳐흘렀다. 정부는 끝도 없이 늘어나는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사형 제도를 강화시켰는데, 1800년에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을 200개로 늘렸지만 범죄는 더욱더 폭주했다. 그러나 광산에는 70킬로그램이 훨씬 넘는 석탄을 여성들이 광주리에 담아 가파른 사다리 위를 오가며 운반했고, 이와 같은 혹독한 노동으로 불구자가 된 여성들이 속출했으며, 어느 탄광에서는 일곱 살 미만의 아이들 173명이 혹사를 당했고, 모든 힘든 작업장에는 어린아이들이 동원되어 짐승처럼 부림을 당했다.

이런 타락한 관습에 대해 윌버포스가 개혁의 도전장을 던진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무모하고 힘든 일처럼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윌버포스는 전혀 위축됨이 없이 과감하게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 침침하고 혼탁한 세계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강력한 관습 개혁운동

윌버포스는 권력의 강력한 후원을 얻지 못하면 개혁 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지 3세에게 경건과 선을 장려하고 악과 불경스러움과 부도덕을 예방하기 위한 포고문을 다시 한 번 발표해 주도록 권유했다. 다시 말하면 윌버포스는 당시 사회구조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계급 사회라는 사실을 유효 적절하게 이용한 것이다. 윌버포스는 포티어스 주교와 상의한 후에 자신의 생각을 피트에게 전달하고 피트는 ‘모든 재량권’을 무어 대주교와 왕비에게 주었으며, 무어가 국왕에게 그 사실을 전달함으로써 1787년 국왕의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국왕의 포고문 공포 배후에는 윌버포스가 있었다.


내무대신은 포고문을 작성하고 여섯 부씩 복사하여 ‘즉시 실행하도록 하라’는 국왕의 명령과 함께 각 주의 장관에게 하달했으며, 윌버포스는 이 포고문의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실천 단체를 조직하고, 지방의 유력 인사들을 방문해서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이 운동을 범국민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런던 사회는 하루아침에 변화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윌버포스의 ‘선한 운동’을 지지했으며, 웨슬리의 신앙부흥운동과 때를 맞추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다. 당시 24시간 영업이 원칙이었던 모든 술집은 영업시간을 저녁 9시에서 10시로 제한하고, 일요일은 모든 술집이 문을 닫게 했다. 1798년 연감을 보면 교회의 진입로가 마차로 가득 찼으며, 1813년에는 교구 사제들의 은밀한 성적 타락이 거의 없어졌고, 매관매직의 독직사건이 사라짐으로써 깨끗한 공직사회라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상류층 사회의 개혁 실태를 보면, 상류층 모든 가정이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대변화’를 겪지 않는 가정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하류 계층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특별하고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졌는데, ‘신앙소책자협회’를 구성함으로써 값싼 소책자를 통해서 하류계층의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며, 도덕성을 함양시키고 영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신앙소책자협회는 설립 50주년이 될 때까지 5천 개의 각각 다른 제목으로 총 5억 부 이상, 1년에 약 2천만 부를 보급함으로써 전 영국 사회를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정화시켰다. 1780년에서 1850년까지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잔인하며, 타락과 오욕, 욕망과 본능과 포악으로 얼룩진, 야수성으로 가득한 ‘더럽고 소란스러운 정글 같은’ 짐승의 나라에서, 뛰어난 도덕성과 깊은 경건과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으로 무장한, 우아하며 고매한 신사의 나라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