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 지혜의 창문(1-20-08)


역사 속의 리더십(이주흠 지음)


지도자의 고전 - 샤를르 드골


이단의 전사

∎군인 드골은 계층사회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프랑스군의 전략과 전술을 거리낌 없이 비판한다. ‘프랑스군은 그 역사에 있어 늘 잘못했다’고 탓한다.


  샤를르 드골은 1890년 프랑스 북부의 도시 리유에서 태어난다. 고등학교에서 철학과 수학을 가르친 앙리 드골의 4남매 중 차남이다. 아들이 영향 받은 행동주의 철학자 베르그송의 친구였던 부친은 역사에 관심을 보이고 스스로 생각하려 한 그에게 플라톤, 소크라테스, 칸트, 니체를 읽힌다. 소년 드골은 수줍음 타고 말수가 적으나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할 때는 공격적이다.

 

드골은 그의 생애를 통해 조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품는다. 역사를 즐겨 읽은 소년기부터 이성과 감성이 이룬 것이다. 선두에 서지 않는 프랑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며 고통의 순간에도 프랑스는 높은 곳을 향해 굳건히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언젠가 큰 시련을 겪게 될 조국을 구할 사명이 있다는 믿음이다. 1871년에는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걸려들어 벌인 전쟁에서 진 프랑스가 알사스․로렌을 빼앗기고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 수치의 기억이 뚜렷한 시대에 자란 드골은 특별한 생각을 갖게 된다.

  파리에서 자란 그는 1909년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간다. 그후 육군사관학교 교관,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땅 원수의 부관, 보병대대장, 최고국방회의 사무국 서기, 육군전략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37년 대령이 되어 기갑연대장을 맡는다. 이 사이에 책도 여러 권 쓴다. 군사와 정치의 리더십을 다룬 『칼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원인을 분석한 『적의 불화』, 프랑스군의 발자취를 그린 『프랑스와 프랑스군』,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와는 별개로 상비군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직업군대를 위하여』, 과학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전투수단으로 등장한 기갑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미래의 군대』를 낸다.

  드골의 주장은 프랑스군의 군사이론과 다르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기갑부대에 의한 기동전이다. 드골의 전법은 유연성이 생명이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써먹을 ‘교범’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 노예가 되어 변화에 따르지 못한다고 한다. 교범이 쓸모 있으려면 상황에 맞춰야 하는데, 이것은 변수를 있는 그대로 보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사고가 유연해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 드골은 이러한 자질을 청년장교 시절부터 엿보인다. 그래서 상관들과 부딪힌다. 그의 안목과 용기가 버거운 동료들로부터도 따돌림받는다. 드골은 진급도 늦다. 낡아빠진 생각의 윗사람들과 다투며 소신을 안 굽혀 눈 밖에 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프랑스는 지난 전쟁의 경험에 따라 고정방어에 매달린다. 정부, 정당, 군의 지도자들에게 마지노선이 신앙이 된다. 1932년부터 5년간 총리직속의 최고국방위원회 사무국에서 일하며 이 사실을 알게 된 대령 드골은 벅찬 통념의 벽에 도전한다. 그는 직전의 전쟁경험(1차 세계대전)에 매달리는 나라는 이것을 뛰어넘는 나라에 늘 졌다며 이것을 ‘패자의 전략’이라고 한다. 드골이 보기에 고정방어는 자기무덤을 파는 것이다. 먼저 공격할 여지를 없애 주도권을 적에게 넘기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여 히틀러가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부터 독일군이 쳐들어오는 1940년까지 프랑스는 정권이 스물네 번 바뀐다. 프랑스의 덧없는 패배는 정치, 군, 사회의 풍조가 어우러져 빚는다. 정당들이 때도 없이 헤쳐 모여 이루는 하루살이 정권이 의욕과 원칙을 정책에 담을 수 없다. 군사도 예외가 아니다. 권위에 자신 없는 정치인은 주관이 뚜렷하기보다 말 잘 듣는 군인이 좋다. 군이 기회주의에 기우는 것이다. 권력다툼으로 지새는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은 나라와의 일체감을 잃는다. 비전 없어 정치를 외면하는 사회는 변화도 꺼린다. 여기에 정치인이 영합하여, 다음으로 군인이 그 풍향에 스스로를 맞춘다. 파국을 향한 악순환이다. 드골의 외침에 메아리가 없었던 이유다.


나신의 저항자

∎국민은 독일에 패한 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정부와 군도 싸우자는 그의 호소를 외면한다. 그래서 저항의 불길을 외로이 홀로 당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빼면 걸친 것 없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결코 고개 숙이는 일 없이 투쟁에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주권’, ‘제국’, ‘칼’을 조국에 찾아준다.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정부가 합법적으로 독일에 굴복한다. 거의 모든 국민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드골은 계속 싸우겠다고 한다. 그래서 부관 한 명만 데리고 영국 공군기로 망명길에 오른다. 6월 18일 조국을 향한 라디오 연설에서 “우리는 전투에 패했지, 전쟁에 진 것은 아니다”며 저항을 호소한 그는 6월 24일 ‘자유프랑스’를 세운다. 드골은 시련이 거세지면 투지도 그만큼 드세지는 사람이다. 4년여 망명시절 드골은 침략자 나치독일과는 무력투쟁, 후원자 미․영과는 권리투쟁, 그리고 같은 프랑스인들과는 정통성 투쟁을 벌인다.

  드골은 미국과 권리투쟁에서 ‘벌거숭이 저항자’이다. 미국의 루즈벨트가 도와 나라를 찾는다. 그러나 은혜 입은 약자답게 고개 숙이지 않아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진다. 루즈벨트와 드골은 합법성을 두고 다툰다. 루즈벨트가 드골과 ‘자유프랑스’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민주절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상가동하는 나라의 지도자가 주권을 빼앗겨 비상가동하는 나라를 위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싸움은 ‘나신의 저항자’가 져야 할 멍에다. 런던의 유럽망명정부 지도자들도 드골에게서 주권을 찾으려고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다윗 드골은 루즈벨트라는 골리앗과 끝까지 맞서 이겼다. 1944년 8월, 마침내 드골의 임시정부(자유프랑스)가 주권을 행사하여 연합군을 돕게 된 것이다. 그가 외세의 꼭두각시였다면, 아니 그렇게 비치기라도 했다면, 그는 ‘프랑스 주권’의 깃발이 되어 국민에게 투지와 긍지를 심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굽히고 물러섰더라면 누더기만 걸친 조국에 ‘주권’과 ‘제국’과 ‘칼’을 가지고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1944년 8월 귀국한 드골은 9월에 임시정부 지도자가 된다. 그는 권력부터 세운다. 이후 국가재건, 정치가들이 벌이는 환멸의 드라마를 보고 은둔, 예순 아홉에 대통령이 되어 다시 재집권 과정을 거친다.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안고 간 드골은 1970년 11월 9일 복부대동맥 파열로 생을 마친다. 80세였다.


거부의 인간

∎자기 나라 사람이 싫다는 내셔널리스트, 강자를 조롱하는 약자, 추종자를 멀리하는 지도자. 행동하는 몽상가. 환호를 탐내며 고독에 희열하는 모순가, ‘거부의 미학’을 즐기는 독선가.


  다음은 드골의 개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자유프랑스’ 시절의 드골은 툭하면 미․영의 결정에 시비 걸어 처칠, 루즈벨트와 부딪힌다. 그와 루즈벨트의 잦은 충돌에 지친 처칠이 드골에게 융통성을 보이라고 한다. “성급하지 마라! 나는 루즈벨트에게 양보하고 비껴가지만 돌아서 목표에 이른다”. 드골이 대꾸한다. “그럴 수 있다. 단결된 나라와 제국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건 내게 너무 무겁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 고개 숙일 수 없을 뿐이다.” 드골은 ‘거부의 인간’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좌파지식인 샤르트르는 식민지전쟁을 맹렬하게 비난한다. 어느 날 경찰과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드골에게 달려와 그가 프랑스군과 싸우는 알제리아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준다며 잡아들이자고 한다. 드골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냥 놔두지! 내가 ‘프랑스’인 것처럼 그도 ‘프랑스’야.” 생각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노벨상까지 거부하고 휴머니즘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위대한 프랑스인이다. 통념의 잣대로 재고 다룰 수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비록 법에는 어긋나더라도 드골이 그리는 지도자상은 그 정도는 넘어서야 했는지 모른다.

  드골에겐 사람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 그를 믿고 신념을 같이하는가, 개성이 있어 뜻을 일관하는가, 문제의 본질을 신속하고 명확하게 파악하는가, 주의가 깊어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기다릴 줄 아는가,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부하가 헌신적일수록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드골의 말이다. 쏟은 만큼의 애정을 바라 공평무사를 막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드골은 1940년 6월 자기와 단둘이 영국행 비행기를 탔던 부관을 2년 뒤 전선으로 보낸다. 1958년 5월 비서실장을 다시 부르나 곧 대사로 내보낸다. 드골과는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지도자의 멍에’에 갈등을 느낀다.

 

드골이 ‘도덕성’을 들먹인 흔적이 없다. 그의 명예가 곧 국가의 그것이었던 만큼 ‘도덕성’은 그저 당연했을 것이다. 재물에 대한 태도도 경멸에 가까웠다. 전직 군인, 대통령으로서의 연금도 사절한다. 나라를 위한 기여를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드골은 사생활도 드러내지 않는다. 감출 게 있어서가 아니다. 공과 사의 구분이다. 남 앞에 서기를 꺼린 부인은 자선활동을 뒤에서 돕는다. 드골이 죽은 후 부인은 남편 뜻이 아니라며 대통령 미망인으로서의 예우를 사양한다. 자녀들도 잊힌 듯 산다. 숨겨진 인간 드골의 모습이 있다. 둘째 딸 안느는 다운증후군 환자였다. 드골은 그녀를 끔찍이 위한다. 시간을 내서는 무릎에 앉히고 ‘대화’한다. 누구와도 통할 수 없는 안느가 아버지와 ‘마음의 대화’를 한다. 스무살 때 죽은 딸을 묻은 드골은 그가 원해 안느 옆에 묻힌다. 드골의 회고록이 가져온 수입은 선천성 정신지체환자를 위한 ‘안느 재단’에 보낸다.

  오늘의 많은 유럽인들은 드골을 ‘어제의 인물’로 제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부활하는 드골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답을 못 찾는 수수께끼를 풀어 보일지 모른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이 독주하며 독일이 하나가 된 이 세계에서 프랑스를 영광으로 이끌 ‘제4의 길’을 펼쳐 보일 것이다.


유럽의 지도자들


‘싸움꾼’과 ‘평화꾼’ - 제2차 세계대전과 처칠, 챔벌린

∎챔벌린은 희생을 마다 않고 타협하며 ‘평화의 황금시대’를 꿈꾼다. 처칠은 ‘이길 희망이 없어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노예로 살기보다 죽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역사는 그것을 위해 싸울 의지가 있는 자에게만 평화를 주었다.

 

윈스턴 처칠은 1874년 11월 20일, 영국 하원의원 랜돌프 처칠과 미국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기 명예혁명의 주역인 존 처칠, 즉 초대 ‘말보로 공작’의 8대손이다. 그러나 허울 좋은 이름일 뿐, 아버지의 낭비벽이 심해 어렵게 자랐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처칠은 명문사립 해로우 스쿨에 들어간다. 역사와 작문은 뛰어났으나 수학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시험에서 겨우 붙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합격자 102명 가운데 92등이었다. 장교가 된 후에는 인도, 이집트, 수단 등의 식민지를 옮겨 다닌 끝에 1899년 정계로 나가기 위해 군을 떠난다. 이 때 책도 많이 읽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역사, 철학, 정치서적을 수백 권 섭렵해 지식을 쌓고 시야를 넓혔다. 

  처칠은 스물다섯 살 때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곧 누구보다 많이 낙선한다. 보수당원이면서도 사회복지와 무역에 관해서는 진보주의의 자유당에 가까웠다. 노동자계급에 동정적이었다. 서민대책에 열심이었으며 값싼 식료품 공급을 위해 농산물 관세를 낮추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당과의 갈등이 커진 끝에 1904년 자유당으로 옮긴다. 자유당 내각에서 상무장관, 내무장관을 거쳐 1911년 해군장관이 된 처칠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1924년 자유당이 외교정책과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취하자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당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보수당에서도 찬밥신세였다. ‘완고한 제국주의자’인 탓이 컸다.

  술을 무척 좋아해 하루를 ‘위스키 소다’로 시작한 그는 자주 논리적 사고에 앞서 직관적으로 판단했다. 위인들에게서 흔히 보는 ‘본능의 힘’이다. 아이디어도 많았다. 탱크를 생각해 내고 로켓에 빠졌으며 적의 레이더를 혼란시킨다며 비행기에서 금속파편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행동을 앞세우면서 문장을 즐겼던 처칠은 책을 쓴다는 것은 ‘편하고 즐거운 친구를 옆에 두는 격’이라고 했다. 글이 수수하면서도 힘과 멋이 있던 그는 평생 쉰여섯 권의 책을 냈다. 빈틈없는 채비로 명연설도 남겼다. 짧고 분명한 단어와 문장을 좋아하고 리듬을 중시했다. 길게 설명하는 대신, 비유로 의미를 압축해 전달했다.

  처칠은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 남달랐다. 나치 독일의 위협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누구보다 먼저 ‘철의 장막’을 찾아내고 ‘냉전’을 진단했다. “과거를 돌아볼수록 더욱 멀리 미래가 보인다”고 한 처칠의 선견지명은 쉬지 않고 탐구한 역사에서 얻은 것이다. 처칠은 히틀러의 도박이 차례로 먹혀드는 것을 맥없이 지켜보다가 모든 것을 잃고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비로소 여론의 부름을 받는다. 나치 독일이 출현한 1933년부터 전쟁이 막을 여는 1939년까지 처칠이 메아리 없이 외친 이 시기는, 그와 반대로 느끼고 행동한 네빌 챔벌린과 처칠이 승패를 가른 과정이기도 하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진 순간, ‘평화꾼’ 챔벌린을 대신하여 ‘싸움꾼’ 처칠이 등장한 것이다.


1937년 5월 28일 총리자리가 챔벌린에게 넘겨진다. 챔벌린은 자신 넘치는 사람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머리 좋고 돈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로서도 좌절 겪는 일 없이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정상에 이른다. 챔벌린은 그가 유럽정세를 꿰뚫는다고 믿는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상대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 독재자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것을 그의 사명으로 여긴다.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양보를 해서라도 타협하려 한다. ‘평화를 가져온 지도자’로 역사에 남기를 원한다. 그래서 재무장관 시절부터 어떤 이유로도 군사비를 늘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처칠은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진 다음날인 1938년 3월 14일 국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유럽에서는 잘 계산되고 시간에 맞춘 침략계획이 차례로 실천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오스트리아처럼 굴복하거나,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위험을 없애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태의 추이를 뒤쫓기에 급급한 동안 우리는 안전과 평화를 위한 자산, 그리고 우리의 동맹과 우방을 계속 잃게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이어 누구에게나 히틀러의 다음 표적은 체코슬로바키아임이 분명했다.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체코 북부 주데텐 독일인의 ‘차별’을 들먹였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체코를 공격할 생각이 없다며 일단 발톱을 숨기고는 독일계 주민을 차별에서 구하기 위해 주데텐을 되찾겠다고 한다. 챔벌린은 히틀러가 그 목적을 위해 싸울 작정이라고 느낀다. 이를 피하려면 주데텐을 독일에 주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는 히틀러가 ‘약속하면 지킬 사람’이라는 인상까지 받는다. 돌아온 챔벌린은 프랑스에게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자고 한다.

  처칠은 9월 21일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에 의한 체코 분할은 나치의 위협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항복에 다름 아니며, 결코 평화와 안전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면서 “체코의 방비가 무너져 이곳의 독일군 수십만이 서부로 돌려짐으로써 우리는 더욱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칼을 빼지도 못한 체코는 칼집째 히틀러에게 넘겨졌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좋은 사이를 맺어 ‘평화의 황금시대’를 열어갈 꿈이던 챔벌린은 충격을 받는다. 심리적 안정을 잃는다. 히틀러의 첫 총성이 울린 지 4주 만에 오스트리아, 체코에 이어 세 번째 나라 폴란드까지 유럽지도에서 사라지자 챔벌린이 처칠을 찾는다.

  1940년 5월 13일 총리로서 처음 국회연단에 선 처칠은 “피, 노력, 땀, 눈물밖에 내놓을 것이 없다”고 한다. 앞으로 “긴 투쟁과 고통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 그는, 그러나 자신에게 목표를 묻는다면 ‘승리’가 그 대답이라고 한다. 그에게 시련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물일 뿐이다. 챔벌린은 평화주의자다. 그래서 희생을 마다않고 타협한다. 오늘날이라면 뮌헨에서 돌아와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히틀러는 그를 높이 사지 않는다. 오히려 위협하면 기죽는 약골로 얕본다. 그래서 먹혀드는 도박을 멈추지 못한다. 그런 히틀러가 처칠은 꺼린다.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투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평화는 값진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얻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을 위해 싸울 의지가 있는 자에게만 평화를 주었다.


일본의 지도자들


국가 재생의 리더십 - 요시다 시게루

모두가 영합하고 침묵하던 군국주의 시절, 용기와 개성이 쌓은 저항의 기록으로 패전 일본의 지도자에 오른다. 근시안의 대중적 여론과 타협하는 대신, 길게 본 국익을 좇아 ‘새 일본’을 설계한다.

 

요시다 시게루는 무사집안 출신으로 다께우찌 다가시의 열네 자녀 중 5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의 친구인 요시다가에 양자로 간다. 나중에 경부철도회사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다께우찌는 후일 그가 외교관이 되자 공직자로서 부정의 유혹을 자르라는 뜻으로 가보인 칼을 선물한다. 그러나 관리 요시다는 잘 나가는 그룹에 끼지 못한다. 처음 간 곳이 만주 봉천의 영사관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30여 년의 외교관 생활 중 해외근무의 절반가량을 중국 각지에서 보낸다.

  요시다는 양부모의 큰 재산을 물려 받는다. 메이지유신의 주역 오쿠보 토시미츠의 손녀, 정계 실력자의 딸과 결혼하여 후광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늘에 묻혀 지낸 것은 개성이 강해 윗사람 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시다가 처음 영사가 되어 만주로 떠날 때 부친은 아는 사이인 아들의 상사 앞으로 편지를 써준다. 그러나 요시다는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가 돼서야 비로소 전한다. 까닭을 묻는 상사에게 그는 “아버지 덕을 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동에 영사로 있던 1915년에는 쫓겨날 뻔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내밀며 윽박지르자, “터무니없는 짓으로 반일감정만 불러 외교를 망친다”며 다른 공관들까지 부추겨 반대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1936년 요시다는 총리가 된 친구 히로다 코우키의 권유로 주영대사를 맡는다. 요시다는 영국에 있으면서 정부에 맞서고 비판한다. 1936년 9월 나치독일과 방공협정을 맺기로 한 군부는 모양새를 갖추려고 중요한 나라에 나가 있는 대사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거의 모두 찬성하는데 요시다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군부는 국제공산주의와 함께 싸우자는 것일 뿐 정치나 군사적인 의미는 없다고 어르나 요시다는 그 결말이 뻔하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렇게 주장한다.

  ‘독일의 실력을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영국․프랑스․미국은 전 세계에 걸쳐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 쌓아온 정치, 경제의 저력도 있다. 독일과의 협정이 이념의 문제일 뿐이라고 하나, 이런 것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독일과 이태리편에 선다는 뜻이다. 결국은 정치적․군사적 제휴로 이어지게 된다. ‘현상타파’를 부르짖는 이들 국가가 전쟁을 일으킬 경우, 일본은 영․미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할 수 있다. 일본으로서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나, 굳이 선택한다면 영․미로 하는 것이 일본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나 요시다의 반론 따위는 아랑곳없이 같은 해 11월 독․일 방공협정이 성립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때를 같이하여 이태리도 끼는 ‘3국 동맹’을 맺는다. 요시다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덕분에 군부가 그를 ‘반군분자’로 낙인찍는다. 1939년 3월 주영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요시다는 1945년 패전과 더불어 외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야인으로 남는다.

  패전 후 자유당을 이끈 하토야마 이치로는 요시다의 친구다. 그런데 점령군 당국이 그의 과거를 문제삼아 1946년 정계를 떠난다. 이때 요시다가 하토야마의 부탁으로 당시 제1야당이던 자유당을 맡고 총리에 오른다. 외교관 경력뿐인 요시다는 이렇게 우연에 의해 정치에 입문한다. 그러나 요시다가 이른 곳이 그가 걸어온 길과 동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군국주의, 국수주의의 광기 속에서 모두가 영합하고 침묵하던 시절, 일개 관료로서 주눅 드는 일 없이 비판하고 저항했기 때문이다. 용기와 개성이 쌓아올린 항거의 기록이 있어 정상에의 길이 열린 것이다.

  패전 후 일본을 재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드라마의 주인공 요시다 시게루, 그의 철학은 ‘좋은 패자’였다. 패전국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다. “역사는 뒤집을 수 있다. 전쟁에 지고도 외교로 이긴 역사가 있다”고 했다. 그는 정복자인 미국이 잘못 판단하거나 실정을 무시하면 일단 사정을 설명하고 설득해 본 다음 그래도 듣지 않으면 순응하고 후일을 기하기로 한다. 패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되 훗날 주권을 찾은 후 승자가 한 일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요시다는 국제정세를 바르게 보는 것이 국가전략의 출발이라고 믿었다. 그는 새 진로를 ‘세계 속의 일본’으로 정했다.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을 지배하는 미국과 손잡고, 그 힘을 빌려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시다는 굴종이라고 비난이 쏟아지는 속에서 그가 먼저 미국에게 동맹을 맺자고 한다. 종속적이라도 빨리 독립해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미국의 보호와 도움으로 수출로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요시다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찾고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한다.

  폐허의 일본은 재생에만 힘써야 했다. 그래서 미국이 안전을 지켜줘야 했다. 미국에서 자본과 기술을 들여오고 그 시장에서 수출의 활로를 찾아야 했다. 원료를 들여오고 물건을 팔기 위해 동남아에서 특권을 인정받아야 했다. 총칼로 실패한 것을 외교로 성공해 ‘대동아공영권’을 이루어내야 했다. 이 모두를 위해 아시아에서 공산세력과 맞설 틀을 만들려는 미국을 도와야 했다. 그래서 미국이 무기한 일본에 머물 수 있게 한다. 대신, 실리를 챙겨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는다.

  그러나 1954년 12월 요시다는 소속당의 ‘궁중쿠데타’로 쫓겨난다. ‘대미 추종주의자’의 굴레가 씌워져 권좌에서 밀려난다. 좌우가 협공하고 여론이 ‘악인’으로 취급하는 가운데 7년 2개월 동안 머문 정상에서 추락한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경제도 활기를 잃어 국민의 미움이 더해진다. 자존심 강한 요시다가 치욕 속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며 그가 재평가 된다. 그 즈음의 일본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까지 계속된 ‘안보파동’, ‘미․일 동맹 반대운동’의 열기가 식고 경제가 고도성장 궤도에 들어선다. 요시다가 옳았음이 밝혀진 것이다.

  선견지명이 현역시절 인정되는 지도자는 드물다. 살아 있는 동안에 알아주어도 좋은 운이다. 역사는 살아 있는 자의 명예에 인색하기 때문이다. 요시다는 행운아다. 메이지유신의 공신들과 견줄 만한 국가원로로 대접받던 요시다는 1967년 10월, 89세로 세상을 뜬다. 일본인들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했던 지도자를 국장으로 보내 ‘새 일본’의 설계자에 보답했다.


미국의 지도자들


작은 거인 - 해리 트루먼

∎‘변방정치가’로서 준비가 모자라나 정상에 올라 배우며 결단하여 업적을 쌓는다. 권력을 물려받은 콤플렉스로 ‘권위’에 매달려 강수를 두고 입지를 잃는다.

 

1884년 미국 중서부의 미주리의 농가에서 태어난 트루먼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서 열세 살 때 마을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부터 돈 벌며 공부한 그는 대학에 가기 어려워 사관학교를 지망한다. 그러나 눈이 나빠 좌절되자 철도회사에 들어간다. 그 후 할머니 소유 농장을 맡아 일하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전장에서 돌아와 사업에 손댔다가 실패하고는 1922년 선출직 지방행정관 격인 지방판사로 뽑힌다. 이후 연임하여 서민대책에 힘쓰던 트루먼은 1934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서 출마하려다 좌절하나 뜻밖에 연방상원의원 민주당 후보공천을 얻어 당선된다.

  트루먼은 1944년 말 루즈벨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된다. 대통령에 네 번 뽑힌 루즈벨트는 임기도중에 죽어 신화가 된다. 그의 죽음으로 부통령 82일 만에 트루먼은 대통령에 오른다. 루즈벨트는 동부의 특권층, 트루먼은 중서부의 서민층 출신이다. 루즈벨트는 최고의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온 데 비해, 트루먼은 고졸이 학력의 전부다. 루즈벨트는 평생이 정상을 향한 준비였던 데 반해 트루먼은 이와는 인연이 먼 변방정치의 산물이다.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그늘에 가릴 처지였다. 강박관념이 컸고 홀로 서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인물로 비칠 줄 알면서도 위상에 집착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역사책과 전기를 즐겨 읽은 트루먼으로서는 역사는 ‘지혜의 보고’다. 그에게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새로운 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역사 속에서 비슷한 형태로 여러 번 나타났던 것이라고 한다. 국가지도자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나라뿐 아니라 위대했던 다른 나라들의 역사도 알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본 그는 대통령으로서 일하면서 자주 역사에서 유추하고 현실에 적용한다.

트루먼은 국무회의가 대통령을 뽑는 이사회 같은 것이라고 본다. 장관들은 대통령이 좋아하건 말건 조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즈벨트는 몇몇 각료들과만 따로 모이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중요한 문제는 국무회의에 올려 모두의 의견을 듣는다. 서로 다른 다양한 생각과 반응을 얻은 후 자신이 결론을 내린다. 대통령이 권위를 행사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고 믿는 그는 “구사하는 권위가 현명하면 나라를 위해 좋고 현명하지 않으면 나라를 위해 나쁘다. 그래도 행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다. 나라의 지도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각 부처가 중요한 활동을 빼놓지 않고 보고토록 하는 트루먼은 “고삐를 틀어쥐고 그의 정책을 위해 이루어지는 일을 파악해야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이 원폭실험에 성공한 것은 1945년 7월이다. 그때까지는 이 끔찍한 무기를 일본에 떨어뜨릴 계획이 없었다. 효과도 확신하지 못했다. 트루먼은 각료, 군인,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의논케 한다. 그런 가운데 미군은 일본본토 침공을 준비한다. 미군 피해는 50만 정도로 내다본다. 그런데 위원회가 원자폭탄을 일본에 직접 쓰자고 한다. 이것이 비인도적이라며 사막에서 폭발시켜도 시위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현실적이 아니라면서 파괴력을 보여줄 곳을 고르자고 한다. 트루먼도 같은 생각이었다.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에 대해 7월 28일 일본은 계속 싸우겠다고 한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8월 9일 나가사키가 원폭세례를 받는다.

  흔히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을 ‘역사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대단치 않다’고 한다. 그는 무엇이든 분명히 결정하는 지도자였다. 겉으로 드러나게 고민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한 그는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최선이지만 최악의 결과는 잘못된 결정이 아닌, 결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트루먼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다. 1949년 3월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 외곽에 있다”고 한다. 1950년 1월 애치슨 국무장관도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아시아의 대륙에 위치한 곳은 모두 미국의 방어선에서 빠진다”고 한다. 트루먼도 군부의 건의대로 미국을 한국에서 빼낸다. 그런 트루먼이 전쟁에 나선 것이다. 남침을 뒷받침해 준 소련에게서 침략주의 나치의 망령을 본 탓인지 모른다. 평화를 위한다며 히틀러를 구슬리려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이루어진 역사다.

  한국전쟁이 오늘의 북한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국제관계를 보는 미국의 눈은 전체주의 국가들의 그것과 달랐다. 트루먼은 한국을 지키자며 ‘미국적 가치와 보편적 원칙의 수호’를 국민에게 호소했다. 이를 두고 키신저는 그가 동서대립을 ‘영향력을 둘러 싼 다툼’이 아닌 ‘선과 악의 싸움’으로 여겼으며 이런 신념이 미국정책의 뿌리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이 이렇게 ‘도덕률’을 들고 나온 이상 ‘거래에 의한 타협’은 불가능했고 소련이 그 목표를 바꾸거나, 소련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이루어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고 한다.

  트루먼은 “역사에서 성공한 지도자는 드물다”고 했다. 누구도 트루먼이 좋은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평생 쫓아다녀 지도자가 된 사람들보다 나은 자질을 보였다. 스스로를 남보다 낫다고 믿기 어려운 젊은이들에게 “트루먼이라면 나도 따라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결단을 겁내지 않는 대담성이 돋보였다. 외교에 어둡고 한수 배울 기회마저 잃었으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서 냉전의 시작에 이르는 격변기를 잘 넘겼다. 인권에 관한 링컨 이래의 업적도 있었다.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유리상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공직자의 본분’도 지켰다.

  지도자의 성공 실패를 가늠할 때 재임당시의 인기를 그 척도로 삼지 않는다. 순간의 느낌, 인상, 이해관계의 산물에 불과한 인기는 그저 흘러가 사라지는 강물 정도로 다루어진다. 다음과 같은 것들로 잰다. 정작 결단이 필요할 때 위험부담을 떠안고 결단했는가, 추구한 가치는 일관되었는가, 시운을 잘 타고 났는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었는가, 삶의 역정이 시대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인가, 대의만을 좇았는가 아니면 영화를 향한 욕망이 끼어들었는가? 이렇게 보면 트루먼은 분명히 성공한 지도자다.


리더십의 조건


비전

∎대중에게 필요하나, 없는 것이다. 대중이 결속하는 희망의 가치다. 이기심에 우월한 집단의 긍지다. 지도자를 통해 대중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비전은 대중이 공감하는 희망의 목표다. 자부심을 심어주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비전은 대중이 아쉬운 것을 찾은 지도자가 처방으로 내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라야 지도자의 비전이 그들의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비전은 대중의 참여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강제할 수는 없고 자발적이라야 한다. 대중이 부담을 나눠져야 구현될 수 있는 비전을 그들이 납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방세계가 보기에 스탈린과 고르바초프의 차이는 사탄과 천사의 그것만큼 크다. 폭정에도 불구하도 스탈린이 죽자 많은 소련인이 슬퍼했다. 소련을 세계가 주목하는 강한 나라로 끌어올린 지도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강요한 희생보다 그들에게 심어준 자부심을 더 높이 산 것이다. 서방세계 기준으로 고르바초프는 억압의 족쇄를 풀고 자유를 준 지도자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에 공감하기는커녕, 그를 경멸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들의 평가는 다른가?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에 나선다. 깊게 곪은 이념과 체제의 상처에 손대려는 안간힘이다. 그래서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새 역사를 여는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70년 소련 공산주의 역사를 닫는 마지막 페이지가 된다. 소련사람들이 볼 때 고르바초프는 실패한 지도자다. 개혁과 개방은 자유와 함께 혼란과 궁핍을 낳는다. 나라도 ‘대국’의 모습을 잃고 쪼개진다. 문제는 자존심, 자부심일 수 있다. 나라가 굴욕스럽다고 보면 자기도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고 여길 것이고, 지도자가 이런 상황을 낳았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멸시할 것이다. 서방세계는 고르바초프를 역사적 인물로 기록하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대중의 시선이 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심리에 남긴 상처 때문이다.


사람을 고르는 눈(選人眼)

∎신념이 같고 ‘나’를 믿어야 한다. 하나 되어 충성하기 때문이다. 능력과 행동의지가 있어야 한다. ‘나’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개성이 있어야 한다. ‘나’의 눈귀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 ‘나’의 성가를 높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도움이 필요하다. 지도자로서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그가 쓰는 사람에 크게 달린다. 용인(用人)은 리더십의 거울이기도 하다.


바른 소리로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심기를 건드려 사형을 당할 처지에서 궁형(宮刑)을 자원해 거세된 사람이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이다. 그는 모두가 흉노와 싸우다 패한 장수 이릉(李陵)에게 돌을 던지는 가운데 감히 황제 앞에서 감싸다 화를 당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황제가 이 문제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보도록 간했다. 남들은 내가 황제나 고관들의 심리를 몰랐다고 비웃을 것이다. 자신들의 실수를 정면으로 지적받으면 속이 뒤집히는 심리다. 그러나 이릉은 잘 싸웠고 그가 적에게 가한 손실도 큰 만큼 비탄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똥밭에 나뒹구는 치욕이 기다릴 줄 알면서 글을 남기기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는 사마천은 그래서 “하늘이 옳은가, 그른가? 꼭 착한 사람이 번성하고 악한 사람이 망하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운명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기 130편을 썼다.


자신감이 강한 지도자일수록 바른 말을 수용하기 어렵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일깨우는 현명한 간언 정도라야 그런대로 받아들인다. 한무제(漢武帝)가 사마천에게 그렇지 못했던 것은 권력이 너무 컸던 탓이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현명한 간언에 대한 너그러움인 셈이다.